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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친구는요, 출근할 때마다 차라리 지금 타고 가는 버스가 사고 나서 병원에 안 가도 되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대요, 얼마나 출근하기 싫었으면! 앗, 우리 병원 얘기는 아니고요….” 활기를 띠며 빠르게 말을 쏟아내던 새내기 간호사는 이내 멋쩍은 듯 말꼬리를 흐렸다. 관리자급 간호사의 반응은 결이 달랐다. “행여 관두겠다고 할까봐 요즘은 야단도 못 쳐요. 오히려 신규들 눈치 보며 모시고 사는 걸요.”
얼마 전 대형병원 간호사가 자살한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고 이를 놓고 병원 내 ‘태움’문화가 사회적 주목을 받고 있다. 직원상담실이 집계한 전년도 우리 병원 통계를 살펴보면 태움을 시사한 부적응이나 갈등에 관한 상담내용도 일부 감지된다. 혹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이번에 태움에 관한 전반적 원내 설문조사를 진행해 보기로 했다. 질문지를 만드는 모임을 몇 차례 진행하면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병원의 조직문화와 의료인으로서 우리들 직업의 본질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1980년대 병원은 지금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예전 일화가 떠오른다. 응급환자가 발생한 7층으로 이동식 심전도 장비를 들고 뛰던 후배의사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잠시 숨을 돌리는 중에 선배의사 눈에 띄어 그 자리에서 따귀를 맞았다. “너는 사람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계단으로 뛰어올라오지 않고 태평하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느냐.”
병원은 생사를 넘나드는 극단적 의료상황이 눈앞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곳이다. 자칫 실수하면 큰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엄중한 세심함과 책임감이 요구되고 팀워크가 강조된다. 또한 업무특성상 상당히 폐쇄적 조직문화를 지니고 있다. 서로만 알아듣는 전문용어와 은어를 사용하고 업무상 알게 된 내용에 대해서는 입이 무거워야 한다. 더욱이 ‘유니폼 현상’이라고 해야 할까? 유니폼을 입는 여느 곳들처럼 병원 역시 기강이 센 곳 중 하나다. 직능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질감, 일체감,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는 일사불란이 요구된다. 더디거나 뒤처지는 사람에겐 ‘너 때문에 우리가 고생한다’는 집단압박이 가해지기도 한다. 사실 압박은 내부로부터뿐 아니라 외부로부터도 일어난다. 거친 입담을 지닌 환자나 작은 일에도 지나치게 흥분하는 내원객이 적지 않다. 그렇기에 동료애와 내부결속이 더 강조되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도제식 교육방식이 한몫을 한다. 즉 선배가 후배에게 술기를 전수해야 배울 수 있고 앞사람에게서 인계를 받아야 뒷사람이 곤란을 겪지 않는 업무방식이다. 그래서 선후배 관계가 깍듯하면서도 돈독하다.
이번 설문조사를 준비하면서 한 가지 주목한 것은 문제를 제기하는 ‘유효채널’에 관한 것이다. 가깝게는 동료에게 토로하는 것에서부터 직속상사나 부서장에게 호소할 수도 있고 직원상담실, 노조사무실, 고충처리위원회, 폭력방지위원회 등 원내 여러 장치를 통해 도움 받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채널에 얼마나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는지, 또한 얼마나 실효성 있게 작동하는지에 별도의 점검이 필요하다. 만일 피해나 보복이 두려워 말하는 데에 특별한 각오나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고민과 개선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한편 며칠 전 열린 89주년 개원기념행사에는 졸업한 동문과 퇴직원우 분들의 뜻 깊은 축사가 있었다. 인턴 일곱 사람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정든 행려병동 환자들에게 낡은 환복 대신에 새 옷을 선물했던 미담에서부터, “주삿바늘을 꽂으려면 일단 씻기기부터 해야 했어요. 피부에 때가 쌓여 도무지 그냥은 정맥을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 시절 진료 회고담에 이르기까지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한 분은 소중히 보관해왔던 1970년대 입사 당시 발령통지서와 첫 월급봉투를 가져와 낭독하였다. “지방보건기원보시보(방사선)에 임함. 1호봉을 급함. 동부병원 근무를 명함. 서울특별시장”, “쓰고 나서 후회 말고 쓰기 전에 절약하자”. 다들 빵 터졌다. 그는 백범 선생의 멋진 인용구로 마무리하였다. “돈에 맞춰 일하면 직업이고 돈을 넘어 일하면 소명이다. 직업으로 일하면 월급을 받고 소명으로 일하면 선물을 받는다.”
최근 의료계는 대내외 여러 도전과 제도적 변화에 직면해 있다. 때로는 변화가 급격하여 몸살을 앓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용기를 잃지 않기 바란다. 자성할 것은 자성하고 개선할 것은 개선하며 진정성 있는 노력을 계속해간다면 한층 건강하고 신뢰받는 의료계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일상이 고되더라도 소중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잃지 않기를, 의업의 바탕에 깔린 본질적 기쁨과 보람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김현정 | 서울특별시동부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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