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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도 무척이나 더웠다. 김병준 교육부총리가 야당의 거센 공세 속에 자진사퇴한 것은 11년 전 꼭 이맘때(8월2일)였다. 임명 13일 만이다. 논문 ‘자기표절’이란 신조어와 함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여름휴가 중이었고, 청와대 출입기자이던 나 역시 휴가였지만 이튿날부터 출근해야 했다.

그의 낙마는 이미 내리막길이던 노무현 정부를 더욱 급격히 기울게 했다. 이은 가을, 여당(열린우리당)과의 ‘결별’을 예고하는 전조였다. 실상 더 결정적인 건 여당의 이반이었다. 당시 노 대통령은 비공개 석상에서 “대통령 한번 하려고 그렇게 대통령 때려서 잘된 사람 하나도 못 봤다. 이 상황은 권력투쟁”이라고 ‘격노’했다.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이 2일 국회에서 열린 비대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당신의 출세를 위해 노무현 전 대통령님을 입에 올리지 말아 주시길 당부드린다.”

김 전 부총리가 자신을 낙마시켰던 그 세력(자유한국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자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의원이 던진 비판이다. 뇌사상태인 보수의 산소호흡기를 자처한 그에게 ‘기회주의적 변절’의 비수를 꽂은 것이다. 11년 전 낙마 뒤 사석에서 전 의원 같은 당시 ‘청와대 386’들에게 강한 섭섭함을 토로했던 걸 생각하면 현 여권과 김 비대위원장은 참 복잡한 인연의 실타래로 얽힌 셈이다.

2004년 2월 열린우리당 워크숍에서 처음 본 김 비대위원장은 정책적 이상주의자였다. 자신의 재주를 알아주는 주군을 좇는 ‘제자백가’와도 같았다. 당시 그는 정부혁신위원장이었다. 말은 강했고, 자신감도 커 보였다. 보수·진보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고, ‘지방분권’ 철학에 꽂힌 ‘정책 기능인’에 가까웠다. 노무현은 그에게 그런 주군이었다.

그가 변절한 출세주의자인지, 노무현 정신 일부라도 공유한 계승자인지 논쟁은 중요치 않다. 그건 ‘과거’ 이야기일 뿐이다. 본질은 김병준이란 ‘이종(異種) 인사’가 ‘새 보수’의 길을 설득해 보수 교체의 한 걸음을 뗄 수 있느냐다. 숨만 연장시키는 호흡기 노릇이 아니라, 보수 대수술의 집도의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노무현 정신은 그 미답의 길을 가는 데 필요한 이종교배의 요소일 수 있다. 이종교배는 진화의 시작이 되곤 한다.

실상 ‘보수 혁신’의 해답은 어려운 게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보수 가치에 불어 넣는 것이다. 한국 보수가 철저히 외면해온 핵심이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를 금과옥조로 하면서도 정작 ‘자유’를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세운 결과다. ‘자유’를 강조하는 것으로 친일을 묵인했으며, 군사정권의 잔학과 부패를 변명했고, 개인(기업 포함)의 부정한 탐욕을 ‘미화’했다. 보수의 원리는 ‘사적이익 추구 계모임’의 원리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 며칠 김 위원장의 행보와 언어는 주목할 만하다. 강경한 보수·진보를 대변하는 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국근대화, 안보제일주의 같은 1960~1970년대 언어에서 빠져나올 것”을 주문했고, “반공보수는 안된다”고 못 박았다. 비대위 구성 첫날인 지난달 25일 국립현충원을 찾아서는 방명록에 ‘모두, 다 함께 잘 사는 나라’를 적었다.

당장 내부에선 노선 투쟁을 예고하는 소음들도 들려온다. 초·재선 의원들과의 만남에선 김 위원장의 박정희 비판에 반발하는 목소리들이 삐져나왔다. “우리 당을 노무현당으로 만들려는 것이냐”는 당혹감은 그보다 더 폭넓다. 정치권 호사가들은 벌써 “한국당의 내전”(박지원 의원)을 거론하기도 한다.

물론 보수 혁신의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반세기 이상 거북 등껍질처럼 굳건한 보수의 왜곡된 인식에 메스를 대는 과정은 지난하다. 그가 그만한 유능함과 일관된 의지를 가졌는지는 의문부호다. 친박과의 투쟁 속에서 그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등장했던 ‘유승민의 새 보수’ 실험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좌절했다. 유 의원에 비하면 김 비대위원장은 “윗사람 몇 분만 보고 정치해온 사람”일 뿐 정치적 경륜을 증명한 적이 없다.

실제 과거 그가 설계한 종합부동산세 운명을 보면 경험 부족은 분명하다. “헌법을 바꾸는 정도”의 “불가역적 대책”이라 할 만큼 자신감과 애착을 가졌던 종부세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자마자 형해화됐다. 당시 세수를 지방으로 돌려 ‘종부세 지킴이’로 나설 것이라 기대했던 한나라당 소속 지자체장들은 철저히 침묵했다. 2016년 탄핵 정국에서 국무총리 수락 등 불투명한 처신으로 그저 “주목받고 싶어하는 인사”라는 의심도 깊다.

그럼에도 김병준이란 ‘이종 보수’가 어떤 시작이길 바란다. 보수로 하여금 ‘변종’들을 낯설어하지 않게 하고, 그래서 ‘신종 보수’로 진화해 나가는 출발이길 바란다. 다만 보수가 결코 기술이 없어 실패한 게 아니란 점만 새겼으면 한다. 마음이 없는 기술이 실패를 만들어 온 게 보수의 몰락사이기 때문이다.

<김광호 정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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