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아버지가 한 달여 전 암수술을 했다. 3년 전에 이어 두 번째다. 다행히 수술은 잘됐다. 아버지는 지난해 갑자기 눈이 안 보인다며 안과를 찾아갔다. 시력을 잃을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눈에 여러 번 주사를 맞았는데, 앞으로도 더 맞아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1934년생이다. 한국 나이로 여든다섯. 젊을 때 앓아누운 적이 없다 했으나 세월엔 장사 없는 법이다. 차에 탈 때 아버지는 느릿느릿 몸을 말아 넣는다.
아버지가 몇 해 전부터 주민자치센터에서 운영하는 컴퓨터 교실에 다닌다. 요즘은 엑셀 프로그램을 배운다. “느그 아버지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침부터 컴퓨터 배우러 간단다.” 어머니가 말했다. “저도 엑셀 잘 모르는데, 아버지가….” 팔순 노인이 엑셀을 배워 어디에 쓸까. 가계부를 정리할 것도, 사업계획서를 쓸 것도 아닐 터이다. 그저 세월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그런 생각이 아닐까?
지금 세상은 청장년 시절 아버지가 부대껴온 세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알파고로 대표되는 AI는 물론이고, 사물인터넷, 드론과 가상현실 체험까지 등장했다. 전상진 교수는 <세대 게임>에서 ‘시간의 실향민’이란 표현을 썼다. 변화의 속도에 맞출 수 없는 사람들이 과거 시대에 머물며 실패자로 낙인찍히는데, 이에 맞서 저항하는 노인 등이 ‘시간의 실향민’이라고 했다. 개발독재시대 때만 생각하며 박정희·박근혜를 연호하는 태극기 시위대를 두고 한 말이다. 한데, 이념 성향을 떠나 생각해보면 나도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는 데 가랑이가 찢어지는 ‘시간의 지각생’이다. 1991년 입사했을 때는 원고지에 기사를 썼다. 수화기에 대고 기사를 부르거나 팩시밀리로 보냈다. 지금 기자들은 사건 발생 즉시 온라인으로 기사를 송고하고, 페이스북·트위터 같은 SNS를 통해 뉴스를 뿌린다. 앞으로는 동영상 시대란다. 뉴스 제작환경은 천지개벽했다. 나도 눈이 핑핑 도는데 하물며 아버지는?
노인들이 체감하는 세상의 변화속도는 젊은이보다 더 빠르다. 과학적으로 그렇다. 나이가 들면 신진대사가 느려진다.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르는데 몸이 못 따라가니 시간의 흐름이 상대적으로 빠른 것같이 느낀다.
아버지는 역사를 핏물로 기록하던 시대를 살아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 한국전쟁으로 큰형(내게는 큰아버지)을 잃었다. 장자를 잃은 상심으로 드러누운 아버지(할아버지)도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박정희와 전두환 등 두 번의 군사쿠데타를 지켜봤다. 네 번의 민주주의 혁명을 체험했다. 4·19와 1980년 광주항쟁, 1987년 민주화운동 그리고 촛불혁명까지. 소년·청년·장년·중년·노년까지 그의 몸을 관통한 것이 다 역사였다. 때로는 총으로 쓰이고, 때로는 핏물로 기록되고, 나중에는 촛불로 밝힌 바로 그 역사의 목격자이자 주인공이다. 어느 순간이 가장 강렬했을까. 자신의 목숨줄만 아니라 가족의 생명까지 위태로웠던 그런 순간들일 것이다. 내가 조금 힘들 때, 희한하게도 어려운 시절 아버지의 초조한 표정이 불쑥 떠오른다.
아버지는 사업도, 장사도 했다. 한 10년 장사가 잘되다가도 갑자기 어려워지곤 했다. 정치·경제·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림살이만 변하지 않고 편안할 리 없다. 농경제, 경공업, 중화학공업, IT, AI까지 산업구조도 혁명적으로 변해왔는데 이런 구조적 변화를 끝까지 버텨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만하다. 예전엔 사업에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친지들이 쌈짓돈을 추렴해 재기 자금을 보탰으니까. 지금은? 말 꺼내기도 어렵다고 한다.
아버지는 가끔 묻는다. “대통령은 어떠냐, 지방선거는?” 그러고는 내 의견에 자신의 생각을 포갰다.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 네 뜻대로….” 내 형제들이 “대학 졸업해도 취직하기는 저희 어릴 때보다 더 나빠졌다”고 하면 아버지는 “내 손주들은 잘될 터이니 걱정 마라” 했다.
어릴 때는 누구나 아버지의 등에 업혀 세월의 징검다리를 건넌다. 문득 내 아이들이 나를 앞질러 가고 있을 때 비로소 아버지를 돌아본다. 팔순 넘어서도 컴퓨터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아버지.
‘모든 역사는 현대사’란 말이 있다. 역사는 현재 건재한 사람들에 의해 다시 해석되고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비틀어 생각하면 자신의 몸으로 역사를 썼던 주인공들인 노인들은 이제 기록자가 아니라 역사 속의 인물, 객체가 됐다. 그래도 노인들은 현재의 끈이라도 잡으려 한다. 영어도, 컴퓨터도 배운다. 한데 청장년들은 그들이 걸어왔던 시절을 얼마나 이해하려고 노력할까. 눈부시게 찬란한 5월. 연초록 새싹도 늙은 가지에서 비어져 나오는구나!
<최병준 문화에디터>
'주제별 > 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교의 안과 밖]단순 통계와 왜곡된 해석 (0) | 2018.05.15 |
---|---|
[김진경의 교육으로 세상읽기]교육정책 지형 변화와 시민의 참여 (0) | 2018.05.14 |
[김진경의 교육으로 세상읽기]미래교육 생태계지도 (0) | 2018.04.16 |
[시론]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의 대학교육 (0) | 2018.04.05 |
[학교의 안과 밖]사교육 부추기는 자유학기제 (0) | 2018.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