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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눈이 많은 올해다. 밤새 소복이 쌓인 눈처럼 12월의 밤들도 소리 없이 내려앉으며 한 해의 끝에 닿고 있다. 지난 한 해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들 마음속 시간들을 포근히 감싸는 하얀 위로들이다.

지난 26일자 경향신문의 1면 첫 화두는 ‘77만원세대’였다. 통계청의 ‘2017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 지난해 30세 미만 저소득 청년 가구 한 달 소득이 78만원이었다는 것이다. 2007년 여름 우석훈·박권일이 저서 <88만원세대>를 통해 비정규직으로 상징되는 청년의 불안한 삶을 공론화한 지 꼭 10년 만이다. ‘88만원세대’가 ‘삼포세대(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면, ‘77만원세대’는 스스로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라고 한다. ‘생’ 자체를 부정하는 허깨비 같은 삶들의 절망이 가슴에 박힌다.

출처:경향신문DB

20대의 상위 5%만 공무원·대기업 같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나머지 95%는 비정규직인 ‘0.5 대 9.5’의 사회가 88만원세대의 사회상이라면, ‘77만원세대’는 더욱 악화됐을 터. 어쩌면 ‘0.1 대 9.9’의 사회가 지금 우리 눈앞에 서성이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절망의 심연은 다른 곳에 있다. 추락하는 청년의 삶과 달리 국가·기업의 부는 커지는 모순이다. 2006년 국내총생산(GDP)은 847조8760억원이었다. 지난해는 1637조4200억원으로 2배 가까이 성장했다. ‘30대 기업집단의 사내유보금 추이’ 자료를 보면 기업들 유보금은 2006년 127조4000억원에서 2015년 478조원으로 275% 폭증했다.

자본은 고삐 없이 증식하지만, 공동체는 깊은 속병이 들고 있다. 헤어날 길 없는 불평등은 절망을 낳는다. 절망은 분노를 만든다. 분노는 한 사회를 파괴한다. 이런 공동체가 지속가능할 것인가는 우리 모두의 가슴을 짓누르는 질문이다. 부의 편중과 민심의 균열은 모든 국가들의 말기적 증상이었다. 그래서 부의 편중의 통제는 정치의 책무다.

문재인 대통령은 26일 국무위원들과의 만찬에서 “촛불민심을 받들어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일은 1년, 2년 이렇게 금방 끝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적폐청산의 목표가 비정상 권력의 정상화, 즉 우리 사회 권력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면 참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탄핵과 대선을 통해 정치권력의 변화를 이뤄냈을 뿐 우리 사회 각 권력들의 관계가 정상화됐는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결국 적폐청산의 궁극적 지향점은 구성원들의 삶이어야 한다.

적폐청산의 완성은 공동체를 위협할 만큼 심화한 부의 편중과 불균형의 해체다. 이는 ‘자본의 민주적 통제’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장권력에 휘둘리고 위협받는 정치·사회 권력을 정상궤도로 돌려놓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권력(손)’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정치·사회 권력의 극복은 지금 모든 국가들의 고민이고 과제이기도 하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미국 정치 시스템은 갈수록 ‘1인 1표’ 원리보다는 ‘1달러 1표’ 원리에 동화돼 가고 있다”고 탄식했다.

실제 문재인 정부 1호 정책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이었다. 그 첫 발자국으로 찾았던 인천공항공사는 26일 비정규직 1만명의 정규직화를 위해 3000명은 직접 고용, 나머지 7000명은 자회사 정규직으로 채용키로 했다. 그 확대판이라 할 공공부문 일자리 확대를 담은 새해 예산안도 “포퓰리즘” 비난 등 진통 끝에 간신히 국회를 통과했다. ‘중소기업 다 망한다’는 일각의 선동에도 최저임금 인상도 일단 결정됐다.

이처럼 하나하나 지향하는 것은 소득과 자본의 분배, 편중·편식의 완화에 맞춰져 있다. ‘임금 상승-소비 촉진-생산 증가’의 선순환으로 경제성장과 복지를 모두 이뤄내겠다는 ‘소득주도 성장’론은 자본의 민주적 통제의 다른, 아주 완화된 표현으로 읽힌다.

하지만 고삐 없는 자본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운위될 때마다 따라붙는 이야기는 ‘기업 죽이기·때리기’다. 90% 시민의 삶은 나빠지는데 국가·기업은 살찌는 모순 속에서 자본의 민주적 통제가 ‘기업 괴롭히기’로 둔갑하는 현실이 기막히다. 민주적 권력의 권위를 위협할 만큼 자본의 힘은 세다.

자본이 권위를 가진 권력에 의해 정상 통제될 때 개인의 삶도 나아진다는 경험을 주는 것이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다. 어쩌면 문재인 정부에게 주어진 그 시간은 길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니 하고 싶은 것 다해’라는 여론의 동력에도, 입법 과정에선 소수정권임을 연일 확인하는 게 현실이다. 자본의 민주적 통제와 이를 밀고 가야 할 정권의 현실적 조건의 괴리는 크다. 앞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넘어서는 길은 그만큼 험난하다. 영리한 정치권력의 유능함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광호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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