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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이재의, 전용호가 5·18광주민주화운동 상황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넘어넘어)를 읽다가 눈물을 쏟았다. <넘어넘어>는 1985년 출판되자마자 판매금지됐으나 당시 시민·학생들이 몰래 복사해서 돌려 읽던 ‘지하의 베스트셀러’였다. 얼마 전 개정판이 나온 것은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역사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움직임 때문이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3학년이었다. 당시 중학생과 고등학생들까지 계엄군에 희생당했다. 그런 역사의 현장에서 나는 그냥 철딱서니 없이 구경만 하는 학생이었다. 이후 역사의 공간에 있던 5·18이 다시 ‘현재’로 소환될 때마다 부끄러움을 느꼈다. 죄책감이다. 부끄러움으로부터 도망쳐 오랫동안 복음주의 기독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이미지

부끄러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수치심과 죄책감이다. 수치심은 ‘능력 없음’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뭔가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절망하고 자책한다. 죄책감은 ‘용기 없음’에 대한 것이다.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것, 현장과 현실로부터의 도피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 차원을 넘어서더라도 동료와 역사에 대한 빚진 마음이 남을 수 있다. 이건 부채감이 된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과 부채감을 남겼다. 문재인 대통령과 황석영도 5·18에 부채감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오월 광주 현장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시민들도 이런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980년 신군부가 광주의 민주화운동에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강력하게 진압했던 것은 공포심을 조장하여 시위를 포기하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현장에서 가공할 폭력성을 목격한 시민들은 경악했다. 진압봉으로 머리를 후려갈기고 말리는 노인까지 구타했다.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영문도 모른 채 공수부대에 폭행당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다친 시민을 병원으로 싣고가는 택시운전사가 “사람이 죽어가는데 병원으로 먼저 옮겨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자 차 유리를 깨고 개머리판과 진압봉으로 기사를 폭행했다.

‘30명이 넘는 젊은 남녀가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알몸으로 붙잡혀 기합을 받고 있었다. (중략) 이들이 조금이라도 구령을 따라 하지 않거나 동작을 느리게 할 경우 몽둥이가 가차 없이 날아갔다. 특히 여성들의 곤욕스러움은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넘어넘어)

최정운 교수에 따르면 ‘광주는 폭력극장’이었다. ‘공수부대의 폭력은 당하는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들을 위한 것’(오월의 사회과학)이었다.

광주시민들도 처음엔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공포심은 동료 시민들이 이유 없이 죽어나가는데 보고만 있었다는 수치심에 의해 약화됐고, 이 수치심은 인간으로서 참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분노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졌다. 학원의 셔터문을 내려 겨우 빠져나올 수 있게 해놓고 기어나오는 학원생들을 진압봉으로 내리치던 모습을 보던 YWCA 신협 직원 박용준은 그때부터 시위에 가담했다. 그는 5월27일 새벽 YWCA에서 진압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건설자재 사업을 하던 박남선(26)은 공수대원이 여고생의 가슴을 대검으로 희롱하는 것을 목격했다. 항의하는 할머니를 군홧발로 걷어차는 걸 보고 항쟁에 뛰어들었고, 나중에는 시민군 상황실장까지 맡았다. 대학생들의 시위는 이렇게 시민들의 항쟁으로 바뀌었다.

공포심과 수치심을 넘어서는 것은 생명과 맞바꿀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공포심을 딛고 일어서니 연대감이 작동했다. 주부들은 주먹밥을 해 시민군에게 나눠줬고, 헌혈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젊은 여자 한 명이 양말 수십 켤레를 가지고 와서 (사망한) 시민의 맨발에다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신겨주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여자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려 하지 않았으나 알려진 바로는 술집 접대부였다고 한다. 그녀는 입관할 때 물을 떠다가 직접 시신의 얼굴들을 정성스레 씻어주기도 했다.’(넘어넘어)

사람들은 역사의 길목, 아니 삶의 모퉁이에서 수치심과 죄책감, 그리 부채감 사이를 맴돌면서 고민한다. 어떤 이는 부채감을 느끼고 세상을 바꾸려고 하고, 어떤 이는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다가 화살을 상대방을 향해 돌리기도 한다. 최근 영화 <택시운전사>가 개봉됐다. 37년이 지난 지금도 5·18이 영화나 책으로 자꾸 소환되는 것은 “부끄럽지는 않은가?”라는 인간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최병준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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