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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당신은 저항하지 않았습니까?” “왜 당신은 기차에 탔습니까?” “1만5000명의 사람이 거기 있었고 수백 명의 간수들만 있는데 왜 당신은 폭동을 일으키거나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에서 제 발로 처형장까지 걸어가 자신의 무덤을 파고, 옷을 벗어 가지런히 쌓아놓고, 총살당하기 위해 나란히 눕게 한 이들에게 저항하지 않은(또는 못한) 유대인의 비극적 죽음에 대해, 그들의 복종과 순응을 따져 묻는 검사의 질문을 소개하고 있다. 아렌트는 그 이유에 대해 직접 말하는 대신 부헨발트에 수용되었던 다비드 루세의 말을 인용한다.

“고문당한 희생자들이 저항 없이 스스로 교수대에 목을 매고, 그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더 이상 긍정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포기하도록 요구되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그저 일어난 것은 아니다. 아무런 까닭 없이, 단순한 가학성 때문에 비밀경찰 요원들이 유대인의 패배를 요구한 것은 아니다. 교수대로 올라가기 전에 희생자를 이미 파괴하는 데 성공한 체제가 … 한 민족을 노예 상태로 만드는, 다른 것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최상의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안다. 복종하는 가운데, 바보처럼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이 인간의 행진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없다.”

나치 시대를 살았던 노인들 중엔 그 시절엔 자전거에 자물쇠를 안 채우고 문 앞에 세워둘 수 있었고, 장발과 싸움패는 제국노동봉사단에 끌려갔다는 걸 나치의 업적으로 기억하곤 한다. 파시즘이 지배하던 이탈리아를 살았던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을 고백한다. 그 시절엔 기차가 시간표대로 제 시간에 운행됐다는 것이다. 이처럼 질서와 규율이 지켜지던 세상이었지만, 유대인은 보호받지 못했다. 거리에서 유대인 여성이나 노인이 돌격대원에게 폭행을 당해도, 유대인이 운영하는 상점 유리창이 박살나거나 방화를 해도 지켜보던 시민들이 함께 항의하거나, 경찰이 다가와서 도와주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갔다. 공권력이 가해자와 공범일 때, 가해자들은 그런 일을 저질러도 아무도 처벌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피해자들은 아무리 피해를 당해도 사회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어 무기력해졌다.

최근 들어 나는 몇 가지 사건에 주목하고 있다. 교과서와 참고서 발행으로 오랫동안 부와 명성을 쌓은 한 출판사에서 전직 대통령을 조롱하는 사진을 공무원 수험용 일반 교재에 수록했다. 신출내기 편집자의 실수라고 한다. 모 종편 방송국에서 김학의·장자연 사건과 관련하여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여론조사 결과를 다루면서 공수처 설립 찬성 의견이 82.9%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여주는 그래프에서는 반대 12.6%와 모름/무응답 4.5%와 거의 비슷하게 표시하여 방송했다. 아마도 그 방송국은 이것 역시 실수라고 해명할 것이다. 방송에서 자료 화면이나 이미지에 ‘일베’ 같은 특정 사이트의 왜곡 이미지를 사용해 물의를 빚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와 관련한 재발 방지 약속은 구두선에 그치고 말았다.

한 사람이 10여년 전에 벌어진 억울한 죽음에 대해 홀로 증언하고 있다. 피의자도 아닌 참고인이 10여차례 이상 출두해 직접 조사를 받았지만, 정작 이 사건의 피의자로 지목받고 있는 남성 중 일부는 조사받기 위해 출두조차 한 적이 없거나 호텔에서 30분 정도의 약식 조사에 그쳤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직접 고용한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자살 당할까’ 두려워 병원에서 자살 위험도 검사까지 받아 공개했다. 경찰이 24시간 경호를 약속했지만, 신변 보호를 위해 경찰에서 지급한 위치추적 장치 겸 비상호출 스마트 워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기계 고장이거나 실수였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우연과 실수가 여러 차례 겹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진실을 알고 있다. 우리가 침묵하는 한, 평범을 가장한 악의 시대는 끝나지 않는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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