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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기지 안에서 발생한 불법행위에 대해 제보를 하려던 병사가 수사관을 만나기 전에 기합을 받던 중 사망한다. 군은 사건을 원만하게 해결해 달라며 ‘합의 전문 변호사’에게 의뢰한다. 헌병대 여 수사관과 사건을 조사해 나가던 변호사는 결국 군 내부 고위층의 뿌리 깊은 불법과 인권침해 인식과 관행을 발견하고 법정에서 그들 스스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교사’ 혐의를 실토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다.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쳤지만, 결국 ‘몇 사람의 의인’들의 용기와 헌신, 노력에 의해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가 실현된다. 1992년에 개봉했던 할리우드 영화 <어퓨굿맨>(몇 사람의 의인들) 이야기다. 미국 해병대에서 발생했던 실제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의인’들이 보복과 불이익에 내몰리고 ‘악인’들은 영광과 명예, 평안을 누리고 있다. 사관학교 입학부터 중령에 진급할 때까지 모든 교육과정을 수석이나 차석으로 졸업하고, 중요 요직을 거치며 촉망받던 육군 헌병 황모 중령 이야기다. 언론에 따르면 2010년, 당시 수도방위사령부 헌병단장으로 재직 중이던 이모 준장이 부하들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며 5000만원에 이르는 공금을 횡령해온 사실을 발견한 황 중령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육군 중앙수사단장에게 익명으로 편지를 써 이를 알렸다. 하지만 그는 결국 ‘복무규율 위반’ 및 ‘보안규정 위반’ 등의 사유로 감봉 3개월이라는 중징계와 따돌림의 대상으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황 중령의 제보 편지를 받은 육군과 국방부는 ‘장성 비리 의혹 수사’보다는 ‘제보자 색출’에 전력을 기울였고, 결국 그의 신원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2011년 4월, 언론에 해당 의혹이 보도됐고, 그로부터 2개월 후인 6월, 국방부 검찰단이 “의혹이 제기된 횡령 대부분이 사실임을 확인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미 전역한 이 준장에 대한 수사를 민간 검찰에 의뢰했다. 하지만 검찰은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내사종결’ 처리를 했다.

병사들이 먹을 빵 구입비와 방탄헬멧 도색비 등 총 5000여만원을 횡령한 ‘악인’은 장성에게 지급되는 모든 영전과 영예를 누리며 전역한 반면, 군 내부가 썩어들어가는 비리를 목격하고도 모른 척 눈감았다면 승승장구 권력과 지위가 보장됐을 엘리트 장교는 ‘의인’ 노릇을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49세가 된 황 중령은 4년 뒤면 곧 청춘을 다 바쳤던 군에서 쓸쓸히 퇴장해야 할 위기에 직면해 있다. 각 계급별 승진 시한 내에 승진하지 못하면 ‘계급정년’에 걸려 퇴직해야 하는 군 인사규정의 특성 때문이다.

비리, 날조, 성 군기 문란, 병영 가혹행위 등으로 한국 군대는 얼룩져만 간다. (출처 : 경향DB)


최근 우리 군은 총체적 위기 상황에 봉착해 있다. 세월호 참사 구조 실패의 한 축을 담당하는 해군 ‘통영함’의 수중음파탐지기 비리 의혹은 국민적 분노를 일으키고 있고, K-11 소총 격발 결함, 이지스함 소음 문제 및 구축함 전투체계 노후화 등 전반적인 ‘방산 비리’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잇따른 병영 내 가혹행위와 성 군기 문란 사고, 총기 난사 사건 및 의문사 등 병영문화의 후진성과 인권유린 상황에 대한 질타도 쏟아지고 있다. 급기야 대통령까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며 특단의 조치를 당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예상되는 군의 대응은 법과 제도 개선, 예산 증액, 뼈를 깎는 노력 다짐, 일부 문제 관계자 문책 등이다.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꺼내는 ‘해묵은 레퍼토리’다.

오래된 구조와 관행이 낳은 ‘군 적폐’들의 일부가 되어 비리 행위에 가담했거나, 문제제기를 하면 자신의 진급 등 영달에 지장을 초래할까봐 눈감고 귀막는 방관자였던 이들이 장관과 총장과 사령관들이 되어 있는데, 어찌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올 수 있을까? 황 중령 같은 ‘의인’들을 보호하고, 청년 군인들에게 황 중령 같은 참군인이 되라고 교육해야 군 비리가 척결되고 튼튼한 국방을 이룰 수 있다.


표창원 | 범죄과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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