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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교육부와 보건복지부 등 4개 부처 장관이 공동으로 9개 항의 ‘어린이 헌장’을 발표했다. 한국 동화작가협회 발표 내용을 보완한 뒤 공식화한 것이다. 그 3항은 “어린이에게는 마음껏 놀고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4항은 “어린이는 공부나 일이 몸과 마음에 짐이 되지 않아야 한다”였다. 1988년 개정되면서 표현이 다소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어린이 정책의 핵심이다. 그런데, 2009년부터 올해까지 ‘어린이 행복지수’가 6년째 내리 ‘OECD 국가 중 꼴찌’를 기록하고 있고, 그 주된 이유로 성적 압박과 학습 부담, 그리고 ‘부모와의 관계’가 꼽히고 있다.

지난주 목요일 서울에서 12세 초등학생이 골목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자살 가능성을 높게 둔 채 수사를 진행 중이다. 학교폭력 피해 등 뚜렷한 동기가 발견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지나친 학원 과외와 성적 압박 등 ‘학업 스트레스’가 원인일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시되고 있다.

교육부 조사에 따르면 어린이·청소년의 40%가 한 번은 자살을 생각하고, 9%는 실제로 자살 시도를 해본 경험이 있는데 그 이유로는 ‘성적과 진학 문제’가 53.4%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꼭 ‘성적이 나빠서’만이 아니다. 늘 1등을 달리던 청소년도 다른 친구에게 뒤처질까봐, 그리고 너무 힘들어서, 목숨을 끊고 있다.

그동안 역대 정부와 교육계, 그리고 부모들은 대한민국의 어린이 관련 공식 철학이고 정책인 ‘어린이 헌장’을 정면으로 위반해 온 것이다. 록 어린이 헌장에 강제력이나 법적 구속력이 없으니 처벌을 할 수는 없지만, 국가와 사회가 규범과 의무, 책임을 위반해 온 것이다. 아직 선거권도 없고, 독립을 하지 못한 상태라는 어린이들의 약점을 악용해, 육체적 감정적으로 착취하고 학대해 온 것이다.

7일 서울숲 체육공원에서 열린 어린이 인라인 스케이트 대회에 참가한 어린이들이 힘차게 스케이팅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칠곡과 울산 사건처럼 신체적 폭력으로 죽여야만 ‘아동학대 살인’이 아니다. 모든 어린이가 타고 태어난 ‘맘껏 뛰어놀 권리’, ‘친구들과 격의없이 우정을 나눌 권리’, ‘사랑과 관심, 보호를 받을 권리’를 무자비하게 빼앗고, 미래의 직업과 돈벌이, 그리고 부모의 만족과 자부심 혹은 한풀이를 위해 친구를 경쟁자로 삼은 채, 오직 ‘공부’에만 매진하도록 내몰아 결국 영혼이 꺼지도록 만든 것도 ‘아동학대 살인’이다. 그 배경에는 ‘갑질’이 도사리고 있다. 힘이나 돈, 지위가 있는 자들이 약하고 낮은 자들을 짓밟고 괴롭히고 착취해 대니 사회 전체가 ‘한’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내 자식은 절대로 무시, 천대받지 않게 하겠다’, ‘지금 죽어라 공부하지 않으면 사람 취급 못 받는 낮은 지위, 천한 직업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런 ‘공포’는 갑질하는 기득권층도 가지고 있다. 혹시나 내 자식이 낮은 지위로 떨어져 지금 자신들이 하는 갑질의 대상으로 전락할까봐 두려운 것이다. 혹여나 ‘개천에서 난 용’이 강한 힘을 가지고 모든 것을 바꾸고 복수를 할까봐 겁이 난다. 그래서 ‘사교육 광란’으로 철옹성 같은 ‘진입장벽’을 구축하고, 입시와 채용, 승진과 출세 등 ‘신분상승의 기회’를 독점하고 차단하려 애쓴다. 부자들이 몰려 사는 강남이 ‘사교육 지옥’이 된 이유다. 그중에서도, 아직 자녀를 위해 확실한 경제적, 신분적 안전을 확보하지 못한 중산층의 상승 욕구와 하락에 대한 공포가 가장 크다. 최근 발표된 현대경제연구원의 ‘우리나라 가계의 엔젤계수 특징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중산층의 교육비 지출비율(엔젤계수)이 18.6%로 가장 높게 나타난 이유다. 그만큼 그 자녀들의 고통과 스트레스도 크다.

해마다 5월이면 대통령과 정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앵무새처럼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 ‘미래의 희망’이라고 읊어댄다. 그리고 뒤에선 그 ‘보배’와 ‘희망’들을 학대하고 목 조이는 모순과 불합리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과연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을까? 더 늦기 전에, 올바른 현실 인식과 각성을 기초로 한 변화와 행동이 필요하다.


표창원 | 범죄과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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