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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영국 ‘매카시 사건’ 판례는 “법은 실제로 정의로울 뿐 아니라, 정의롭다고 보여져야 한다”는 법 원칙을 확립했다. 교통사고를 낸 매카시에 대한 형사 재판에 참가한 재판부 서기 중 한 명이 관련 민사 재판에서 매카시의 반대편인 보험회사를 대리한 법무법인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피고 측이 공소기각을 요청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해당 서기가 재판과정에 어떤 의견도 제시한 적이 없다’며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렇지만, 항소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휴워트 항소심 재판장은 ‘정의롭다고 보여지지 않는 재판부는 심판을 할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원심판결을 뒤집고 무죄판결을 내렸다. 다른 사람의 법적 책임과 유무죄를 심판해야 하는 재판부는 ‘실제로 정의로울 뿐 아니라, 정의롭게 보여지고 정의롭다는 신뢰를 받아야 한다’는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 확립된 것이다. 이 원칙은 이후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 재판부뿐 아니라 기소를 담당한 검찰에도 적용되는 철칙이 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떨까? 201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사법 신뢰도’ 최하위이며, ‘사법제도를 신뢰한다’고 응답한 국민 비율은 27%에 머물렀다. 남에게는 가혹하고 스스로에겐 한없이 너그러운 ‘제 식구 감싸기’가 차지한 비중이 무엇보다 클 것이다. 지난 6일 대검찰청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비위 사실이 밝혀진 검사 228명 중 실제 징계를 받은 이는 42명으로, 18.2%에 그쳤다. 2013년 12월 말 여기자들을 성추행한 혐의가 드러난 이진한(당시 서울중앙지검 2차장) 검사에 대해 징계위원회에 회부조차 하지 않고 경고처분으로 무마했다가 피해자로부터 형사 고소를 당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검찰은 ‘형사 피의자’ 이 검사에 대해 1년 동안 수사하지 않고 있다가 지난 1월에야 형식적인 조사를 하는 데 그쳤다. 아직까지 이 검사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음란행위를 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는 김수창 제주지검장이 면직 처분됐다_연합뉴스



이미 우리 사회와 국민은 속칭 ‘스폰서 검사’ ‘그랜저 검사’‘김학의 전 법무차관’ ‘김수창 전 제주지검장’ ‘간첩사건 조작 검사’ 등의 예를 통해 어떤 범죄와 비리를 저질러도 ‘검사’라는 신분만 가지고 있으면 일반 국민과 달리 ‘치외법권’을 누린다고 믿게 되었다. 이런 ‘믿음’은 검사들 사이에서도 퍼져 있는 듯하다. 수사권과 기소권, 형집행권을 독점한 ‘절대 사법권력’인 검사는 대통령 등 극소수의 절대권력자 이외에는 건드리지 못한다는 현실 인식이 종종 매우 위험한 ‘비극’을 만들어 내고 있다.

희대의 사기범 조희팔의 버젓한 밀항과 자유로운 중국 내 도피생활의 이면에는 그로부터 수억원을 받고 뒤를 봐준 김광준 전 부장검사가 있었다. 그에 대한 경찰 수사는 ‘특임검사’라는 꼼수를 부린 검찰에 의해 강제로 중단되고 ‘제 식구’인 검찰로 넘어가 그 배경에 고위급 인물이 더 개입되어 있는지를 밝히지 못한 채 종결되고 말았다. 결국 2011년 말에 사망했다는 의문의 동영상만을 남긴 채 미스터리가 될 때까지, 중국 공안에 적극적인 공조 요청을 하지 않은 검찰과 법무부의 태도는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실제로 비리와 결탁이 있었는지 여부는 외부의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정의롭다고 보여지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범행 18년 만에 가까스로 송환된 ‘이태원 살인사건’의 범인 아서 패터슨 역시 오만과 독선에 빠진 검사가 미군 범죄수사대와 경찰의 수사내용과 확보된 증거마저 무시한 채 에드워드 리를 지목해 기소하는 바람에 벌어진 비극이다. 게다가 ‘증거인멸’ 혐의로 기소했던 패터슨에 대한 출국정지 조치를 연장하지 않아 그의 미국 도피를 방조한 것도 역시 검사다. 하지만, 이런 비극을 야기한 검사에 대해 검찰은 어떤 책임도 묻지 않았다.

사회 정의의 최후 보루인 법과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다면, 국민의 준법과 도덕을 기대하기 어렵다. ‘배경과 인맥이 정의를 이긴다’는 피해의식이 법집행과 판결에 대한 저항과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검찰 스스로의 주장처럼,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산다’. 스스로 바로 서지 못한다면, 대부분 선진국가의 예처럼, 무소불위 독점적 권한을 해체해 사법과 민주적 통제의 대상이 되게 해야 한다. 그래야 더 무서운 비극을 막을 수 있다.


표창원 | 범죄과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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