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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사무치는 즈음에 지나간 일은 글감으로 삼지 않는다는 칼럼의 불문율을 한 번 깨겠다. 2017년 한가위가 선물한 연휴가 꿈처럼 지나갔다. 지난 연휴는 밥벌이의 최전선으로 돌아온 생활인들에게 이미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게다가 11월도 하순이 코앞이다. 어정거리다 연말이 바로 코앞일 테다. 이때 하필 다시 펴느니 김매순(金邁淳, 1776~1840)의 <열양세시기>이다. 김매순은 신라의 “가배”에서 추석의 기원을 찾은 뒤 말한다. “이날은 아무리 구석진 시골 가난한 집이라도 으레 모두 쌀로 술을 빚고 닭을 잡아 음식을 한다. 안주며 과일도 넘치도록 한 상 가득 차린다.” 이 때문에 당시에 이미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加也勿減也勿, 但願長似嘉排日)”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돌아다녔다고 한다. 정말 오래된 관용구 아닌가. 사대부 또한 이 분위기에 젖었던 모양이다. 설, 한식, 중추, 동지 가운데 중추, 곧 한가위의 묘제를 가장 풍성하고 크게 치르는 경향이 있다고 김매순은 설명한다. 부모형제, 고향, 고향을 지키는 친구를 떠올리는 마음에 상하귀천이 있을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김매순은 “하인, 종, 머슴, 거지 모두가 부모의 묘를 찾는다”는 옛글을 인용한 다음 마무리한다. “오직 이날이니까 그런 것이다”라고.

한국인은 이 문화를 이어는 받았다. 우리는 좀 더 맛나고 특별한 음식을 좇아다녔고, 일상과 다른 공간을 찾아 떠났다. 여기까지다. 휴가는 늘 짧기만 하고, 계획과 예산을 벗어난 지출은 11월까지도 돌아오는 짜증스러운 할부금으로 남았다. 음식은 어떤가. 남들이 사니까 덩달아 산, 송편을 필두로 한 떡이며 약밥이 지금 냉동고 속에서 잠자고 있지 않은가. 지금 냉동고 문을 열어볼거나. 그 송편은 필시 자다 못해 얼어 죽어버렸을 테다.

무언가 하던 대로 하는데 구체적인 행동은 다르다. 자본제 시대, 산업화 시대니까 음식은 그저 “사 먹지 뭐”로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 여행 또한 “여행 상품” 구입이라는 지름길이 있다. 그동안 세상은 너무 급히 변했고, 우린 너무 지쳤고, 음식 하는 법도 여행 하는 법도 가꿀 기회가 별로 없었다. ‘개저씨’는 돈밖에 모르고, 청년은 취향을 벼릴 겨를이라고는 없는 시대라고 하면 지나칠까. 그래서 더욱, 세시가 남긴 문화와 행동을 나를 돌보고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매체와 기업은 동지, 성탄 전야, 연말연시를 굽이치며 탐식과 고급 숙박 상품 판매에 활활 불을 붙일 테지만, 일상과 문화 일체를 소비에 의지할 수만은 없다. 내 줏대와 내 손이 빛나는 시간을 만들어 보겠다는 시도가 귀하다. ‘주말이니까 사 먹자’가 아니라, 주말만큼은 반찬을 만들자는 골목길 여기저기의 모색과 한 길이다. 매끼는 어렵지만 하루 한 끼는 내가 장을 보아 내가 내 밥상을 차려보자는 온당한 마음가짐과 같은 궤다.

어정하다가 동지가 훅 닥칠 테다. 우리는 별로 우리 일상을 가꾸며 지내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과 준비가 필요하다. 지난 송편은 냉동고에다 장사 지냈다. 그렇다면 다가올 동지팥죽은 어떤가. 역시 나한테 돌아가야 한다. 내 입맛, 취향은 어떤가. 나는 별미 죽 가운데 실제로 팥죽에 입맛 다신 적은 있나. 덩달아 먹을 테냐, 내가 내게 다른 수를 낼 테냐.

팥죽도 김치찌개만큼이나 집집이 다 달랐다. 통팥 퍼진 팥죽, 팥물을 고듯 쑨 팥죽, 쌀알을 살린 팥죽, 쌀가루로 방점 찍은 팥죽 등등 천차만별이었다. 새알심의 탄성과 질감도 저마다의 입맛을 탔다. 찹쌀가루와 밀고 당길 갖가지 전분도 취향껏 쓰였다. 동지팥죽에는 꿀로 단맛을 더했다. 대추를 고아 풍미를 더하기도 했다. 저마다의 손이 사라지면서 다채로움도 빛을 잃었다. 소가죽 젤라틴에다 꿀, 계피, 생강, 정향, 후추, 대추고를 더해 굳힌 전약(煎藥), 그러니까 프랑스 제과로 치면 앙트르메 또는 데세르에 준하는 과자가 팥죽에 따라오기도 했다. 이런 맛의 설계는 사자고 해도 없는 노릇이다.

송편은 냉동고에서 얼어 죽었다 치고, 이제 팥죽이 냉장고 합성수지 찬통에서 보글보글 괼 차례인가. 아, 죽이 쉬다 괸다는 말 또한 오늘날에는 알아먹기 어려운 말이 되었다. 이러나저러나 한 해에 한 번이다. 한 번이니까 내가 해 보자, 같이 모여 배워서 해 보자 하는 마음이 골목골목 자랐으면 좋겠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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