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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에 여행을 다녀왔다. 충남 곳곳을 방문하는 당일치기 여행이었다. 내가 맡을 역할은 해설자라고 했다. 부여에 있는 신동엽문학관에서 신동엽 시인 관련 특강을 해주면 된단다. 제안을 받고 어리둥절했다. “저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요?” 연락을 해온 사람은 아마 난감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난 후에야 나는 버스에 탑승하겠다고 대답했다.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재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이번 여행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여행을 두려워한다. 여행을 떠올리면 자기도 모르게 설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답답한 일상의 반대편에 여행을 위치시키는 사람도 있고, 휴식이라는 단어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여행에서 마주할 수 있는 낯선 풍경에서 생동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바로 그 낯섦 때문에, 나는 여태껏 여행을 멀리해왔었다. 남들이 여행의 묘미로 파악하는 그것이 내게는 ‘예기치 않은, 당혹스러운 상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기다렸다는 듯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당일치기여행, 국내여행, 가이드가 동행하는 단체여행 등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이 있어 실로 다행이었다.

공주역에서 난생처음 만난 사람들이 아트버스에 올랐다. 첫 번째 코스는 무령왕릉이었다. 가이드의 상세한 설명 덕에 어릴 적 배웠던 내용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문제는 자유시간이었다. 무심코 오솔길을 따라 내려갔다가 일행에서 벗어난 나 자신을 발견하고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예기치 않은 일이 어김없이 벌어진 것이다. 몇 번의 통화 끝에 아트버스에 다시 오를 수 있었다. “시인이라 갑자기 시 쓰러 가신 줄 알았어요.” 운전기사님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는 동네에서도 길을 잃어요.” 내 말에 버스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내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나는 한배를 탄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기 시작했다.

내 뒤에 나란히 앉은 분들은 네 자매였다. 첫째와 막내가 함께 앉고 둘째와 셋째가 함께 앉았다. “막내랑 나랑 열두 살 차이예요. 띠는 같지요.” “언니는 자기가 업어 키웠다고 하는데, 그때 기억이 날 리가 있나요? 갓난것이 뭘 알겠어요.” “애들 다 키우고 나니 자매 생각이 나더라고요. 한평생 고생했으니 시간 내서 좋은 것 보러 다니고 싶었지요.” “우리는 계절마다 꼭 한 번씩 이렇게 나들이해요. 신산한 삶에 활력도 되잖아요.” ‘신산하다’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접해서 그런지 눈이 번쩍 뜨였다. “우리 셋째가 왕년에 글깨나 썼어요. 그때는 끼니 때우기도 힘들어 지원해줄 생각을 못했지.”

미륵사지에 도착하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하늘 좀 봐, 그새 발갛게 익었네.” 미륵사지석탑이 국보 제11호라는 설명을 들으며 버스에서 내렸다. “저기 돌기둥 좀 봐. 옛날에는 끌 것도 마땅히 없었을 텐데 어찌 저 무거운 것을 옮겼을까?” “석탑을 복원 중이라니까 저기 한 번 들어가보자.” 네 자매가 빚어내는 활기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여행할 때마다 쭈뼛거리기 바빠 중요한 장면을 번번이 놓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보려고 애쓰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지금껏 나는 나를 오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행의 장점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게 있다. 바로 견문(見聞)을 넓힐 수 있다는 것. 견문을 넓힌다는 것은 지식을 쌓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그때 그 순간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것, 바로 그 현장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현장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람들에게만 열리는 것이다. 입을 연 사람에게 풍경이 하나의 추억이 되듯 말이다.

뭔가에 홀린 듯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깨달은 게 있어요. 여행을 하니 평소에 안 쓰던 단어를 쓰게 되더라고요.” “신산하다?” “네, 그것도 오랜만에 건져 올린 단어예요. 석탑, 연못, 발갛다… 하나같이 잊고 지내던 것들이에요. 단어의 뜻을 아는 것과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잖아요. 돌아가는 길에 오늘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 생각해보세요.” “시인 양반, 여행 끝자락에 설레기 시작하네!” 그 말을 들으니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 여행이 기다려졌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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