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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동네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했다.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왔나 둘러보는데 군수가 눈에 들어왔다. 오, 군수도 토론회에 참여하는구나,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간단한 인사말이 끝나고 토론회가 시작할 무렵 군수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자리를 뜨는 군수 때문에 참석자들은 미리 사진을 찍으러 우르르 무대 앞으로 나와야 했다.

무슨 바쁜 일정이 있었나 싶어 군청 홈페이지에서 일정을 찾아보니 토론회 참석은 공식 일정이 아니었고 다음 일정은 몇 시간 뒤였다. 식량위기 시대에 먹거리 기본권을 보장할 방법을 찾는 중요한 토론회가 왜 공식일정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공식일정이 아님에도 참석한 것을 감사해야 할까, 아니면 뒷일정이 나중인데도 먼저 자리를 뜬 걸 질타해야 할까. 왜 우리는 이런 풍경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현장을 방문할 뿐 지키지 않는 정치

토론회나 행사에서 이런 장면을 목격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국회에서 열린 행사에서도 국회의원들은 시작하기 전에 인사말하고 좋은 자리에서 사진만 찍고 자리를 뜨곤 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사람들은 그와 관련된 논의에 빠지고, 보좌관들이 자리를 지켰다. 국회가 진정 대의기관이려면 잘 들어야 하는데 권력을 가진 이들은 현장을 잠깐 방문할 뿐 그곳을 지키지 않는다.

그런데 그곳을 지켜야만 알 수 있는 어려운 사정들이 있다. 왜 혼자서 일하는 것이 위험한지, 위험한 화학물질을 어떻게 관리하고 안전담당자를 어디에 배치해야 하는지,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누구를 만나 어떤 정보를 얻어야 하는지, 긴급하게 대응하려면 누가 권한을 가져야 하는지 등등. 만약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현장에 있었다면, 우리는 많은 산업재해나 사고, 참사를 막고 조금 더 민주적이고 효능감 있는 결정과정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태원 참사 이후 중요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나는 모르쇠로 외면하다 문제가 조금씩 드러나자 일제히 현장을 질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말 현장이 문제였을까? 뒤로 이동해 달라고 소리치며 동분서주했던 경찰관이 문제였을까? 여기저기서 심폐소생술을 도왔던 시민들이 문제였을까? 참사를 수습하려 정신없이 뛰어다녔던 사람들이 초분 단위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할 판이다.

언론의 카메라 앞에서만 사과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권력은 어떠한가? 무려 156명이나 목숨을 잃은 대형참사인데, 서울경찰청장은 오후 11시를 넘겨서 보고를 받았고 경찰청장은 자정을 넘겨서야 보고를 받았다. 행정안전부 장관이 오후 11시20분에야 보고를 받았다. 오후 6시34분부터 시민들의 신고전화가 접수되었는데, 국가의 안전체계는 10시를 넘겨서야 굼뜨게 가동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봉화를 피우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건가.

지난 5월, 윤석열 정부는 110대 국정과제를 발표하며 국민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챙기겠다고 밝혔다. 선진화된 재난안전 관리체계를 구축하고 국민의 일상이 안전한 생활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말이다. 그 약속은 대체 어디로 갔나? 이태원 참사 이후에 나온 대책이란 것도 디지털, 스마트라는 단어만 붙였을 뿐 시민의 불안을 없애주지 못한다.

지금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는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더 많은 권력을 가지면서 현장과 결정권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래서 문제가 확인되어도 이를 바로잡을 힘이 현장에 없다. 행정체계를 믿지도 않고 스스로 돌파구를 만들지도 못하는 시민들은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낄 뿐이다.

민주주의의 자리는 현장이다

그 옛날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대승을 거뒀던 아르기누사이 해전을 이끈 장군들은 이후 민회에 소환되어 재판을 받았다.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동료 시민들을 구하지 않고 승리감에 도취해 적을 쫓았다는 이유로 장군들은 사형을 당했다. 

이 사건은 뛰어난 장수들을 처형한 중우정치의 사례로 얘기되지만 민주주의하에서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지금 한국사회가 과연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사만, 사진만 찍고 사라지는 정치인이 없는 사회, 위험이 바로 보고되고 현장에서 바로잡을 수 있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자리를 잡는다. 슬퍼하면서도 우리는 이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연재 | 하승우의 풀뿌리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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