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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모든 미디어는 하이콘텍스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생산자이자 소비자이기에 서로 깊이 얽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청률을 의식하는 텔레비전이 이런 흐름을 주도합니다. 그들은 시청자가 ‘유혹의 그물망’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하이콘텍스트 방식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시청자가 그물 속에 걸려들면 내용에 관계없이 빠져나오기 힘들게 만듭니다.

내용(스토리)을 파는 드라마는 강력한 캐릭터를 지닌 다수의 인물들을 등장시킵니다. 도원결의를 할 정도로 뜻이 맞는 몇몇 사람들이 주도하는 <삼국지> 같은 드라마보다는 개성이 천차만별인 캐릭터들이 등장해서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 <수호지> 같은 드라마여야 합니다. 형식을 파는 토크쇼 역시 개성이 다른 인물들이 ‘떼거리’로 등장해 자신만의 강점을 보여주며 경쟁합니다. 심지어 복면을 쓰고 등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세계의 모든 문제를 ‘중계’하는 뉴스에서는 날마다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니 ‘하이라이트’ 화면만 모아놓아도 잘 돌아갑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미디어에 빠져들수록 삶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습니다. 큰 문제를 잘게 토막내 침소봉대하여 한두 가지만 화제로 삼으면서 전체를 덮어버리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과 원칙을 늘 무시하는 박근혜 대통령은 ‘법질서’를 입에 달고 살면서 남의 탓만 하고, 경제를 망친 여당은 ‘송민순 회고록’을 왜곡해 주장하고, 무능한 야당은 ‘최순실 게이트’에 대해서만 떠듭니다. 그 어느 누구도 통합적인 전망을 내놓지 않습니다.

하이콘텍스트의 힘을 키운 것은 소셜미디어입니다. 그곳은 모든 문제들의 집합소입니다. 매우 다양하게 얽혀서 문제를 키우거나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남이 적은 이야기에 대한 무책임한 수용만 존재합니다.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다는, 비평과는 거리가 있는 행위가 넘치지만 독창적인 사유를 통해 세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안목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믿고 따를 수 있는 ‘어른’이 거의 완전히 실종됐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백욱인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는 일찍이 <속물과 잉여>(지식공작소)에서 ‘속물’과 ‘잉여’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속물’은 “체제 내에 포섭되어 축적하고 소비하는 주체”입니다. 그들은 재산과 지위를 축적하는 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주체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없었습니다. 이들은 생존력이 매우 질기고 거짓말도 잘합니다. 모방과 추종에 능하고 저속 취향인 데다 개성은 실종되어 있습니다. 계산에 매우 치밀하고 자기 소유와 관련된 사안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을 보입니다.

‘잉여’는 “속물 대열에 가담하여 속물 지위를 얻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한 자들 가운데 속물되기를 유예하고 있는 자들”로 “체제 안에 살지만 이상한 방식으로 체제에 포섭된 몸의 비듬 같은 존재”입니다. 이들은 마조히즘과 사디즘을 오갑니다. ‘병신짓’이라고 스스로를 폄하하고 비하하다가 느닷없이 상대를 욕하거나 폭언을 일삼기도 합니다. 주로 “인터넷에서 패거리를 즐기지만 심하게 인정 경쟁에 빠져들면 현실로 걸어 나와 엽기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기도” 합니다.

백 교수는 “애비는 벌써 속물이 되었고, 속물들의 자식들이 자기 계발에 열중하여 차세대 속물되기를 준비하는 동안 속물에도 끼지 못한 애비들의 자식들은 잉여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넘치는 잉여들이 벌이는 ‘잉여짓’이 정보자본주의의 밑거름이 된다는 주장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간이동을 이용해 이익을 창출하는 ‘상업자본’이나 기술력의 차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산업자본’은 글로벌 경쟁으로 갈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공황 상태가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가운데 자본주의 시스템은 판을 갈아엎어서라도 체제를 유지하려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그 방안 중 하나가 아마 전쟁일 것입니다. 위기에 봉착한 세력이 전쟁을 일으킬까 두려워하는 목소리들이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이제 ‘속물’이 될 수 있는 길은 거의 차단되었습니다. ‘속물’이 될 수 있는 지름길인 ‘사법시험’마저 폐지되자 이제 개인이 스스로 해볼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미 ‘속물’이 된 자들은 잉여가 된 제 자식을 챙기는 데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우병우의 아들은 ‘코너링’이라는 간단한 기술만으로도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쌓아도 만만한 일자리 하나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공과 안정에 대한 강박증적 요구로 자기 계발을 열심히 해왔지만 3월에 벌어진 ‘알파고’ 이벤트 이후 모든 직업에 대한 미래가 불투명해지자 넋을 놓고 있습니다.

소셜미디어는 ‘공감의 장치’이고 하이콘텍스트의 생명도 ‘공감’입니다. 둘은 찰떡궁합처럼 잘 맞아떨어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하이콘텍스트가 넘치는 세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공감’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저 누구를 비판하면 내가 뜬다거나 특정한 속물과의 친소관계만 자랑하는 날라리 감수성의 양아치만 넘치고 있습니다.

‘불평등’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근본문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만 원인과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이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아젠다를 제시해야 마땅한 언론이나 대학마저도 어렵다는 이유로 권력이 던져주는 ‘닭모이’나 ‘새우깡’을 주워 먹기에 급급해 입을 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집단적 악몽’ 상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한때 열렬했던 푸른 하늘의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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