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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인간이 일을 하려면 반드시 컴퓨터를 연결할 수 있는 작은 방이라도 있어야 했습니다. 페이스 팝콘은 <클릭 미래 속으로>(21세기북스)에서 모든 개인은 ‘코쿤(참호)’ 속으로 숨어든다고 했습니다. 개인은 반 평에 불과한 자신의 방일지라도 그곳에서 네트워크에 접속하기만 하면 시장과 도서관과 사교클럽을 모두 드나들 수 있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건 없습니다. 그것을 ‘지구방’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방이 없어도 누구나 스마트폰만 들면 전 세계로 연결됩니다. 인지신경과학자인 콜린 엘러드는 <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더퀘스트)에서 “수천년 동안 전통적인 벽은 건축 설계로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완벽한 방법이었다. 벽은 사람들의 이동을 막고 시야를 가린다. 벽은 사생활을 보호하고 안전을 보장”했지만 “지금은 건축공간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 목수가 세운 벽은 여러 중요한 측면에서 구시대 유물로 간주된다”고 했습니다.

출처: 경향신문DB

앞으로 어떤 벽이 필요할까요? 완전한 개인 맞춤형으로 만들 수 있는 전자 벽입니다. 콜린 엘러드는 “당신과 내가 같은 물리적 공간에 있으면서도 각자 전혀 다른 풍경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각자의 성격과 기호, 그리고 씁쓸하게도 구매 이력에 따라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바일 데이터 수집, 생체 인식을 위한 내장 센서 네트워크,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비롯한 기술이 인간의 삶을 혁명적으로 뒤바꿔놓고 있습니다.

<공간의 세계사>(다산초당)의 저자 미야자키 마사카쓰는 5000년 인류사에 여섯 번의 공간혁명이 농업혁명, 도시혁명, 대항해 시대, 산업혁명, 정보혁명 등의 획기적인 사건을 만들었다고 정리합니다. 이런 공간혁명에 공헌한 것은 강, 말, 항해, 자본, 전자 등이었습니다. 특히 “전자공간을 이용한 사회변혁은 ‘대항해 시대’에 필적하는 지구 규모의 가상 공간혁명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모든 정보를 전자기호로 바꾸어 교환하는 디지털 문명이, 편리함과 유용성을 바탕으로 기존 문명을 대규모로 재편”하면서 “막대한 정보가 오가는 전자공간은 세계의 무대에서 활약하는 사람의 수를 일거에 증대”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지구를 무대로 하는 거대한 물류, 정보·문화의 교류, 이민 등에 의한 인구 이동이 일상적인 일”이 되는 변화는 “지역, 국가, 계층 간의 격차를 확대하고 부의 편재와 기아의 확대라는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실업 문제입니다. “컴퓨터와 하이테크 기술은 노동력을 대규모로 절약하게 하는데, 이 문제로 인한 고용 감소와 그에 따라 가파르게 증가하는 실업률은 세계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의 정점에 서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입니다. 인공지능 시스템이 도입됐을 때 일자리를 잃게 될 위험이 가장 높은 직업으로 콜센터 직원들을 꼽습니다. 지금 미국의 대기업들은 주문전화나 애프터서비스를 접수하는 콜센터 업무는 인도나 필리핀의 가난한 여성들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나라에서 업무를 처리해 바로 본사로 전송합니다. 그로 인해 미국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대거 사라졌습니다. 미국에서 인구의 셋 중 하나가 빈곤층으로 전락한 것은 2011년 무렵이었습니다. 그해 9월 20대 실업자들의 주도로 상위 1%가 자본을 독식하는 부조리함과 금융가의 부도덕함에 반발해 “우리는 99%다”라고 외친 월가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미국인들을 사로잡은 것이 ‘예외주의(exceptionalism)’였습니다. 예외주의란, 세계는 미국과 미국 아닌 나라로 나뉘는데 미국이 세계 리더로서 모든 면에서 다른 나라들을 원조하고 계몽해 나가야 한다는 사고입니다. 1830년대 미국을 면밀히 관찰한 프랑스 사회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처음 사용한 말입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시절 공화당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 신봉하며 대외 정책에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2012년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 선거 초기에 공화당의 선두 주자였던 뉴트 깅리치는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나라(A Nation Like No Other)>에서 미국은 다른 나라와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라면서, 정치·외교·비즈니스 분야에서 앞으로도 압도적인 리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즈음 미국에서는 건국과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을 다룬 전기와 영화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잘나가던 그는 두 번째 부인이 ‘깅리치가 오픈매리지, 상대방의 혼외 관계를 인정하자’면서 사생활을 폭로하지 않았다면 아마 오바마의 재선을 막았을지도 모릅니다.

미국의 45대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슬로건으로 ‘아메리카니즘’(미국우선주의)을 펼쳤습니다. 불법 이민자 추방, 강력한 보호무역, 미국과 동맹의 관계 재조정 등 신고립주의 정책을 내놓았는데 이게 바로 예외주의가 나쁘게 진화한 것입니다. 그는 한국이 방위비를 제대로 분담하고 있지 않다는 안보 무임승차론과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미국 내 일자리를 죽이는 재앙이라는 주장도 펼쳤습니다.

트럼프 당선은 마치 2007년 한국 대선에서 이명박의 당선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트럼프가 자신이 내놓은 공약을 실천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많습니다. 경제민주화 실현, 일자리 창출, 복지 확대 등의 공약을 내걸고 집권한 박근혜 정부가 공약을 하나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최순실이라는 개인과 그 일가의 이익만을 채워주다가 망신당하는 꼴을 트럼프가 답습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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