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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두 차례 꽃샘추위가 훼방을 놓겠지만 겨울은 가고 봄이 올 것이다. 매서웠던 찬바람과 추위를 견뎌내니 늘 그래왔던 것처럼 새봄이 다가오고 있다. 이게 자연법칙이다. 우리가 아무리 오는 봄을 마다하고 겨울추위를 더 맛보고 싶어도 봄은 그렇게 온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물은 흘러가면서 막히더라도 평평함을 유지하다가 넘치면 다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이것이 자연법칙이요, 순리다.
정의와 동의어로 사용되는 법(法)이라는 한자도 물(水)이 흐르는(去) 형상에서 유래되었다. 만물이 자연법칙에 따르고 질서에 순응해야 정의가 세워진다는 뜻일 것이다. 법의 옛 한자는 물 수(水), 해태 치(廌)와 갈 거(去)가 합쳐져 있었다고 한다. 해태(廌)는 사리의 옳고 그름을 밝혀 곡직(曲直)을 판단하고 가려내는 능력을 지닌 동물로 알려져 있다.
해태는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하고 사악한 사람을 뿔로 받았으며, 사람이 다투는 소리를 들으면 옳지 못하고 부정한 사람에게 달려들어 뿔로 들이받고 물어뜯었다고 한다. 그래서 법과 정의를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졌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지닌 영험한 동물인 해태는 주로 관청 앞에 세워져 있다. 정의의 상징으로서 관리들의 비리를 감시하는 역할을 기대했던 것이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좌우에도 해태가 자리하고 있다. 지난겨울 우리가 지켰던 그 광장의 북쪽 양편에.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듯 정의도 그렇게 실현되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확신이 있기에 추운 겨울을 버티고 견뎌낼 수 있다. 자연법칙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그 법칙을 따르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법과 정의는 어떠한가. 자연법칙처럼 그저 믿고 기다리면 실현되는가. 언제나 진실이 승리하고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인가. 땀 흘려 일한 만큼 공정하게 누릴 수 있는 공동체인가. 불법과 비리는 파헤쳐지고 법으로 징치되는 법치국가인가. 그렇지 않다.
때로는 부정의가 정의를 누르고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때도 있다. 편법과 뒷거래가 발붙이고 반칙이 통하기도 한다.
법이 다가서지 못하는 성역도 있다. 정치와 행정이 법보다 우위에 있기도 하고 돈이 법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래서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이 부족하기에 때로는 불의와 타협하기도 하고 거짓을 진실로 왜곡하는 데 가담하거나 방조하기도 한다. 힘 있는 자가 곧 정의로 둔갑하거나 돈 있는 자가 거짓과 진실을 거래하기도 한다.
지난겨울, 정의의 상징 해태가 버티고 있는 광화문에서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우리는 정의를 외치며 매서운 추위와 칼바람 속에서도 인내와 끈기로 촛불을 밝혔다. 자연법칙처럼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다행스럽게도 정의도 자연법칙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음을 경험했다. 여전히 정의의 길은 험난하고 멀지만, 아직 무엇이 법인지를 판가름해줄 사법부의 재판절차가 남아 있지만 차디찬 아스팔트 광장에서 찬바람과 맞서 싸우면서 결국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시민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민주권이 확인되는 국회의 대통령 탄핵결정은 그 출발점이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무너뜨린 헌법유린과 국정농단의 실체가 드러나고, 공작정치를 자행하고 권력을 남용한 권력자들이 수사대상이 되고, 정경유착의 고리로 재벌을 지배해온 재벌총수가 구속되자 참으로 오랜만에 법 앞에 평등을 목격하게 되었다. 법의 지배와 거리가 멀었던 재벌에게 경종을 울렸다.
민주주의 촛불은 정치와 정국을 이끌며 입법부와 의회, 언론에도 그들의 역할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시민참여가 민주주의를 성숙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민 스스로에게 일깨워 주었다.
정의는 지연될지언정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광장을 지킨 성과다. 매주 토요일 생업을 뒤로하고, 휴일의 달콤함도 반납한 채 촛불광장을 지키느라 치른 대가는 엄청났지만 그래도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시민의 힘을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을 ‘이것이 민주주의다’라는 감탄으로 바꾸어 놓았다. 불평등과 불공정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채워질 민주와 정의가 살아 숨 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엿본 것이다. 이제 100일 넘게 달궈진 광장의 분노가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을 회복하고 대한민국을 리셋하는 에너지로 승화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태훈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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