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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리셋하고 싶다는 말을 요즘 들어 많이 듣는다. 삶의 어려운 고비를 넘고 있는 사람들에게 리셋의 욕망은 커져만 간다. 그 많은 불운하거나 부끄러운 날들의 이야기를 공중에 날려버릴 수만 있다면. 리셋해서 새롭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많던 영화와 문학과 종교적 간증과 TED 강연의 터닝포인트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래서 생각해보았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인생 리셋의 방법. 주위에도 조용히 제안했다. 자서전을 만들어보자. 후회하지만 말고 삶을 돌아보며 자서전을.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삶의 기록을 엄연한 작품으로 인식하고 나 자신과 거리를 두며 객관적으로 보는 건 어떨지.

문학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서전이란 말에 뜨악해하면서, 인생 말년도 아닌데 무슨 자서전이며, 원고를 써서 출판하자는 거냐고 묻는다. 아니요, 내 답은 단호했다. 누구도 의식하지 말고 자신과 대화하면서 자료를 챙기고 기록하면서 정리하고, 오로지 나만을 위한 자서전으로 봉인하자고. 독자를 의식하는 출판으로서의 자서전 작업은 무거운 무게로 나를 짓누를 것이니 자유롭게 작업해보라고. 결과물로 평가받을 일이 아니니 부담을 저버리고 시작하라고.

오로지 글로 쓰자는 게 아니다. 그랬다면 내가 자서전을 ‘쓰자’고 했겠지, ‘만들자’고 했겠나. 우선 연대기별로 찍은 사진을 추려내자. 아날로그 사진마저도 디지털화해서 카테고리를 정하고 책 챕터를 만들듯, 파일명을 만들어보자. 그리고 또 사건별로, 연대기별로 분류된 사진들을 골라서 배치한다. 사진 파일이 정리된 후에 그 추억의 풍경에 말을 걸듯이 설명문을 적는다. 이 파일들을 담아 딱 한 권의 책으로 만들 수 있는 인쇄 시스템 POD를 이용하여 ‘나만의 자전 기록’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자서전을 만들라고 한 데는 자서전을 만드는 동안 삶의 기쁨과 회한을 정리하면서 진흙탕처럼 빨려드는 현실의 ‘망했다’는 인식을 어느 정도 자신과 분리시키는 의미나 효용을 느꼈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방식의 글로써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것이라면 쉽사리 권유할 수는 없다. 책 한 권의 원고 분량을 채운다는 건 만만치 않은 일. 글쓰기의 어려움에 노출되어 힘겨운 작업을 하는 것이 인생 리셋에 반드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독자가 없는 나만의 자서전이라고 해도 적어도 말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자서전을 굳이 글로써만 만들지 않아도 되는 디지털 시대에는 좀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다.

재작년에 뮤지션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다큐가 개봉했을 때 좀 의아했다. 급작스럽게 요절한 뮤지션이 다큐 촬영을 했을 리 없고 어떻게 인생 다큐가 가능할까 싶었다. 막상 영화관에서 만난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캠코더와 친숙해 어린 시절부터 숱한 영상을 남겼다. 디지털 세대의 자기 기록이란 아날로그 세대가 보기엔 놀랄 정도의 분량이었다. 그 영상들로 에이미의 삶은 자전적인 다큐로 재구성될 수 있었다. 영화 완성도와는 별도로 에이미 와인하우스 삶의 궤적을 좇는 필름 자료가 차고 넘쳤다.

또 지난주에 본 다큐 영화 <페기 구겐하임- 아트 애딕트>도 그런 생각을 촉발했다. 베네치아의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을 만들고 자신의 미술 컬렉션 전시를 통해 한 시대의 미술사를 정리한 페기의 다큐는 생전 인터뷰 목소리로 생생한 느낌을 전달했다. 처음부터 시나리오를 쓰고 캐릭터를 완성해가며 촬영하는 극 영화와 달리 자료를 먼저 구하고 그 자료를 편집하는 방식의 다큐는 그런 점에서 한 인간을 입체적이되 날것으로 보여주는 매력을 충분히 갖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아마 충분한 ‘디지털 자료’가 있을 것이다. 평소에 들춰보지 않았지만 작정하고 찾아내면 쏟아져나올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성장해온 기록들이 있다. 가시화된 자료가 없는 삶의 풍경을 기억에 의존해 구술 기록으로 남겼던 선대들과는 차원이 다른 자서전 만들기가 가능하다. 유명인의 다큐 영화처럼 영상화하자는 것도 아니고, 내 삶의 주인인 내가, 내 과거를 정리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자서전 한 권 갖게 되는 일, 해봄 직하지 않은가.

4·19 세대의 뛰어난 작가 이청준은 <자서전을 씁시다>라는 작품에서 자기 고백, 솔직한 반성을 강조했다. 과거의 일에 집착하지 않고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기 위해서도 자서전 만들기에 몰두하라는 역설이 필요하다.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과거를 정리하고, 한 권에 봉인했다는 의식. 이후에는 삶의 보폭을 조정해 더 크게 앞으로 나아가거나 조금 뒷걸음질치거나 잠시 멈추어도 인생 리셋의 힘이 생길 수도 있다. 현실이 쓰라릴 때, 자서전 만들기 작업을 타고 슬쩍 가벼워보자.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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