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미담기사에는 ‘가시’가 있다. 독자의 마음 한구석을 찔러 독자 자신과 이웃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며칠 전에도 그런 기사를 접했다. 이번에 대학을 졸업한 한 청년이 벙어리장갑 대신 ‘엄지장갑’이란 용어를 쓰자는 캠페인을 벌인다는 인터뷰 기사였다. 벙어리장갑이란 단어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지? 머릿속에서 반짝 스파크가 일어나기까지 몇 초가 필요했다. 아, 그렇지, 벙어리. 언어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이었구나.

돌아보니 참 무심했다. 언어에 민감하다는 시인이, 지금 절실한 능력은 타인의 고통을 자기화하는 상상력이라고 말해온 대학 선생이 벙어리장갑에 담겨 있는 뼈아픈 의미를 놓쳐왔던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청년이 엄지장갑 나눠주기 운동을 펼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청년의 어머니가 청각 장애인이었다. 10여년 전까지는 후천적 시각 장애까지 겹쳐 앞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지병을 앓던 남편마저 저세상으로 떠난 터였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불편한 몸으로 혼자 아들을 키워낸 어머니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다행스럽게 청년의 어머니는 2005년 한 방송사의 도움으로 시력을 회복했다. 그때 어머니는 남을 도우며 살기로 했고 아들도 동참했다. 아들은 대학에 입학한 후 봉사활동에 적극 나섰고 졸업 전 해 ‘설리번’이란 공익단체를 만들어 엄지장갑을 나누어주고 있다.

아들은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쓰는 벙어리란 말이 청각 장애인에게는 큰 상처가 된다”며 “한두 사람이 안 쓰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이런 표현이 사라질 것”이라고. 어디 벙어리뿐이랴. 예전에 비해 많이 줄긴 했어도 비장애인들이 무심코 주고받는 일상어 중에 장애인을 자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엄지장갑 기사를 읽고 나서 궁금증이 도졌다. 누가, 왜 장갑과 벙어리란 말을 결합시킨 것일까. 검색해보았더니 ‘버버거리다’가 ‘버버이’를 거쳐 ‘벙어리’로 고착됐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네 손가락을 하나로 합친 장갑 모양이 말을 못하게 된 구강 구조와 흡사하다고 여겨져 그렇게 지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는 조금 다른 상상을 해봤다.

손은 강력하면서도 섬세한 신체언어 기관이다. 손은 감정 상태를 실시간으로 표현한다. 화가 났을 때는 삿대질을 하고, 분노를 참지 못할 때는 종주먹을 쥔다. 헤어질 때 손을 흔들고, 잘못했을 때는 빌고, 간절히 원할 때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손은 도구를 만들기도 하고 타인을 어루만지기도 한다. 손이 세계와 나 사이를 매개한다. 눈이나 귀에 탈이 나도 힘들지만 손을 쓸 수 없을 때도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속수무책은 메타포가 아니다. 현실이다.

엄지장갑 캠페인 앞에서 어원을 따지는 것은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핀잔을 들을 수 있다. 문제는 언어의 뿌리에 대한 관심이 어디로 확대되느냐에 있다. 나는 언어에 대한 감수성이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능력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언어가 거주하는 장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이기 때문이다. 주고받는 말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작다는 반증이다.

엄지장갑 관련 기사를 검색하다가 문제의 한 본질과 마주쳤다. 벙어리장갑이란 말을 쓰는 것이 왜 잘못이냐고 반박하는 짧은 댓글을 본 것이다. 벙어리장갑이란 말을 쓰면서 단 한번도 장애인을 비하한다는 의식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비장애인이 저 댓글에 동의할 것이다. 나도 그랬다. 자기중심주의. 바로 이것이 사태의 핵심이다. 내가 악의를 갖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안이한 판단 말이다.

내 경험에 비춰보면 상처를 주는 사람은 없다. 상처받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오랜만에 중·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했을 때를 떠올려보자. 학창 시절 내게 상처를 준 친구에게 “그때 왜 나에게 그렇게 심하게 굴었느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은 한 가지다. “내가 그랬다고? 설마.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데.” 그렇다고 장애인 모두가 일방적으로 상처를 받는 약자라는 말은 아니다. 감정 조절 능력 여부를 기준으로 하면 비장애인 중 상당수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자기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수시로 무너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장애인을 비하하는 언행을 삼가자는 캠페인이 환기시키는 것이 또 있다. 차이의 가치를 재발견하자는 것이다.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는 한,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존중과 배려의 사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틀린 것을 나쁜 것으로 받아들이는 한, 더불어 사는 사회는 불가능하다. 차이를 다양성의 기름진 토양으로 인정할 때, 우애와 환대의 공동체가 뿌리내릴 것이다.

살아오면서 가장 익히기 힘든 마음가짐 중 하나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었다. 예수의 황금률이나 맹자의 측은지심이 21세기 인공지능 시대에 더욱 빛나는 걸 보면, 공감과 연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한다. 인간 진화의 다음 단계가 의식혁명이라면, 그 혁명은 아마 감정이입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묘책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먼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을 것이다. 나부터 달라져야 차이에서 ‘사이’를, 사이에서 ‘같이’의 가능성을 부여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