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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는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의 도시인 만큼 87개나 되는 마을이 있다. 효자동, 통인동, 송현동, 팔판동, 소격동, 사간동, 청진동, 인사동 등이 시민들에게 많이 알려진 곳이다. 이들을 법정동(法定洞)이라 부르는데, 법정동은 법에 정해진 일정한 명칭과 영역을 지닌 구역이다. 그리고 그 명칭은 예로부터 전해온 마을의 고유 지명이며 오랫동안 주소, 지적(地籍) 분야에서 사용돼왔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마을의 지명인 법정동명에는 그 마을의 시대적 역사성과 지리적, 장소적 특성이 깃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종로구의 예를 들면, 소격동은 소격동 24번지에 조선시대 도교의 제례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아인 소격서(昭格署)가 있던 곳이고, 사간동은 경복궁 건춘문(建春門)의 길 건너편에 국왕에 대한 간쟁과 논박을 담당하던 관청인 사간원(司諫院)이 있었으며, 팔판동은 조선시대에 여덟 명의 판서가 살았다는 데에서, 청진동은 조선 초기부터 있던 한성부 징청방과 수진방에서 각각 ‘청’자와 ‘진’자를 따 합성한 데에서 유래했다. 그렇지만 지금 도로명 주소 체계에서는 그 명칭을 찾아볼 수가 없다. 소격동과 사간동은 율곡로와 북촌로로 변경되었고, 팔판동은 삼청로로, 청진동은 종로5길, 종로3길로 바뀌어 우리의 옛 지명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2014년부터 도로명주소의 사용을 알리는 게시물. 김정근 기자

1997년 도입이 결정되고 2011년 7월29일 고시된 도로명 주소는 일제강점기의 잔재 청산, 세계적 표준, 효율 향상 등의 이유로 시행하게 됐다. 시행 초기 사회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지번 주소와 병행하여 사용해 오다가 2014년부터 전면 사용하고 있으나, 만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존 법정동 중심의 지번 주소에 익숙해져 있는 시민들로부터 별 호응을 얻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물론 100년 가까이 사용해온 지번 주소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데서 오는 혼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과연 우리나라의 역사적, 장소적 특성을 얼마나 잘 반영한 제도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유럽, 미국 등 도로명 주소가 자연스럽게 정착된 나라는 계획도시가 많고 평지에 위치해 도로가 네모반듯하게 잘 정비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도시는 계획도시도 있지만, 크고 작은 산과 강을 끼고 지형에 따라 자연 발생한 경우가 많다. 또한 오랜 시간 자연적으로 형성된 도로에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거미줄 형태의 복잡한 도로망이 형성되어 있다 보니, 방향과 숫자가 복잡해 도로라는 선을 따라서 위치를 찾는 도로명 주소는 우리의 현실과 인식에 맞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동명을 들으면 대충 가늠할 수 있었던 위치정보가 도로명 주소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도로명 주소 사용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도로명 주소 뒤에 동 이름을 덧붙여 사용하다 보니 짧아진다던 주소는 더 길어졌다. 가장 아쉬운 점은 주소에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마을 이름과 고유 지명이 일부 도로명에만 반영돼 있다는 점이다. 기존의 지번 주소는 ‘○○동 ○○번지’ 형태로 법정동을 사용하며 그 마을의 장소와 역사성을 공유했다. 하지만 도로명 주소에서는 ‘○○로, ○○길’로 도로가 기준이 됨으로써 우리의 머리와 몸이 기억하는 공간에 대한 정보가 결국은 무미건조한 일련번호로 바뀌고, 마을 명칭 속에 오랜 시간 함께해온 역사와 영혼까지도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삶의 터라는 마을의 의미는 사라지고 도로라는 기하학적 공간이 되어 버린 점이 못내 아쉽다.

김영종 서울 종로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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