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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이 끝이자 곧 시작이라는 말은 교사에게 생활기록부와 학교교육계획서라는 말로 다가온다. 교사의 한 해는 생활기록부 마감으로 끝나며, 새 학년 교육계획서로 시작한다. 그래서 2월의 학교는 분주하다. 교육청에서는 장학사들을 학교에 보내 생활기록부와 다음 학년도 교육계획에 대한 점검을 하는데, 올해는 정유라 사건 때문에 유난히 점검이 깐깐하다.

사실 정유라 사건의 본질은 권력자와 그에 결탁한 학교 관리자가 교사에게 행사한 부당한 지시와 압력이지, 교사의 생활기록부 작성 부실이 아니다. 교사가 생활기록부 작성이나 성적 처리 과정에서 부당한 외부압력을 받았는지 여부가 점검의 대상이 되어야지, 문장부호, 날짜 입력방법, 서술방식 따위의 지엽적인 것들까지 하나하나 붙들고 꼬투리 잡을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른바 ‘알파고 시대’니 ‘4차 산업혁명’이니 하면서 쏟아지는 ‘창의 융합 교육’에 대한 요청과 이 사소한 꼬투리들이 부딪쳐 학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한쪽에서는 훈령과 지침으로 생활기록부 작성에 사용되는 문장부호, 표기방법을 세세하게 규정하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획일적 서술을 지양하고 학생의 역량이 드러나도록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다양한 기록을 하라고 한다. 이쪽도 저쪽도 교육부의 지침이다.

미션 임파서블이다. 교육부의 생활기록부 작성요령은 표기법, 문장부호, 문장 서술방식, 뉘앙스에 이르기까지 200쪽이 넘을 정도로 세세하다. 학생들의 개성이 드러나도록 다양하고 창의적으로 서술하다 보면 이 200쪽의 규정에 반드시 걸린다. 그럼 고치고 다시 써야 하니 교사들은 다양성, 창의성보다는 이 200쪽의 규정을 더 중시할 수밖에 없다. 모든 학생들의 생활기록부가 비슷비슷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창의적이지 못한 획일성에 대한 지적이 쏟아진다. 한쪽에서는 왜 똑같이 쓰지 않았느냐고 지적하고, 다른 쪽에서는 왜 창의적으로 쓰지 않았느냐고 지적하는 셈인데, 한마디로 둥근 네모를 그리라는 꼴이다.

우리나라 학교는 곳곳에 둥근 네모를 그리라는 요구로 가득하다. 오지선다형 평가를 지양하고 학생의 창의력을 평가할 수 있는 수행평가와 논술의 비중을 늘리라는 공문이 날아오기가 무섭게, 평가의 객관성, 공정성을 높여 민원의 소지가 없도록 하라는 ‘관리 철저, 감사 및 징계사례’ 따위 공문이 날아온다. 평가의 객관성, 공정성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것을 창의성과 동시에 극대화하라니 또 둥근 네모가 된다.

둥근 네모는 그릴 수 없는 도형이다. 그릴 수 없는 도형을 그리라고 요구하면,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는 척하는 것밖에 없다. 바로 여기서 문서주의와 형식주의가 싹튼다. 대체로 ‘객관성’에서 문제가 생기면 ‘객관적’인 징계를 받지만 ‘창의성’이 부족하면 그냥 지적만 받고 말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교들은 객관성에 집중하고, 창의성은 각종  문서로만 처리하여 열심히 한 척만 하고 넘어간다. 창의성 교육을 아무리 강조해도 학교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다. 네모의 시대가 끝나고 동그라미를 원한다면 도형의 모서리가 조금 뭉툭해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모서리의 각을 포기하지 않고 동그라미를 그리라고 하면 결국 남는 것은 네모밖에 없다. 2017년에는 둥근 네모가 아니라 동그라미 하나라도 제대로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권재원 |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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