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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으로 우리 사회는 지난 고통과 치욕을 되새길 시간을 가졌다. 나 역시 최근 소설을 읽으며 착잡한 심경을 아는 사람들과 학생들에게 토로했던 기억을 자주 떠올렸다. 그 역사는 오금동, 천호동이라는 지명이나, ‘○○녀’처럼 욕설로도 남은 채 현재를 떠돌고 있다. 이민족에 군왕이 머리를 조아린 수치는 한국사에서 영원히 회자될 것이다. 그럼에도 부끄러운 과거에서 현재를 살아갈 교훈을 얻는 부분에서 다른 시각도 요구된다. 항복을 해도 인간은 살아가며, 오히려 굴욕으로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특히 떳떳한 과정에도 불가피한 패배를 맛봤다면 그게 거름이 되어 더욱 큰 결실을 얻을 것이다.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수능을 앞둔 시점에서 많은 학생들은 심리적 고통에 휩싸인다. 수시 전형에 지원했다 이미 불합격 통지를 받은 학생도 있고, 수시 원서를 낸 뒤 치른 모의고사에서 낮은 성적이 나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학생도 있다. 사고력 발휘가 중요한 수능이 코앞인데, 감기 등으로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아 몸과 마음이 모두 아픈 학생도 있다. 큰 시험이 다가오면 잡념을 잊고 집중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시험결과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원인이다.

오랜 기간 준비한 시험인 만큼 마무리가 중요하다. 시험 직전 집중력은 합격이나 고득점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결과는 여러 번 있었다. 최선의 결과를 얻으려면 충실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성실이 성공을 보장하기는 어려우나 성실하지 않으면 성공은 없다. 그런데 결과만 보는 현실에서 수험생의 과도한 불안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남한산성>의 교훈을 패배라는 결과로만 받아들이는 데에는 결과지상주의적인 한국 사회 특유의 문화가 작용한다. 강대국에 수모를 당한다는 점만 부각하면 오히려 과거에서 얻을 교훈은 제한된다.

우리에게 수모를 가한 여진족은 어디 있나?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위안스카이에게 굴욕을 당하고 쑨원에게 멸시받았으며, 일본에 이용당하다 소멸했다. 격투기 선수가 나를 때렸다고 내가 힘이 없어서라고 탓하지 않는다. 강대국 역시 공존의 질서와 국가 윤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비도덕적 폭력을 일삼은 자들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패배라는 결과만 부각시켜서는 안된다. 이는 우리의 정치적, 외교적 도덕성조차 소멸시킬 우려가 있다. 약소민족만 수모를 당하는 것도 아니다. 중국은 비한족이 주도한 진의 통일, 당의 제국화 과정을 거쳤고, 원과 청조에는 이민족 지배하에 놓였다. 프랑스는 스당의 전투에서 독일에 참패한 뒤 통일 독일의 대관식 장소까지 대여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 전승을 수도 베를린에 거창한 기념물로 남긴 독일 역시 2차대전 말기 밀려오는 소비에트 군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모든 고비에서 승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는 과정에 충실해야 좋은 결과를 얻게 될 뿐 아니라,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어도 더 큰 고비를 넘길 힘을 얻는 데 있다. 죽음의 공포와 멸족의 위기에서 김상헌과 최명길은 정면으로 맞섰고 왕 또한 백성을 위해 운명적 선택을 했다. 우리가 우리말과 글, 영화로 이들을 회고하는 것으로 미루어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고통 속에서 인생은 성장한다. 수능이 홍타이지의 군대처럼 밀려와도 온몸을 불살라 맞서기 바란다.

<정주현 | 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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