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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복고적 향수를 자극한 <응답하라> 시리즈와 달리 많은 기성세대에게 청춘의 시작은 대학입시라는 아름답지 못한 기억으로 얼룩져 있다. 고등학교는 입학시험을 위한 수단이었으므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정규 수업은 교육과정을 무시한 문제집 풀이 시간으로 변질되었다. 공부를 잘하는 소수 학생을 제외한 대부분이 수업 시간에서 배제되었으며, 교사의 능력 역시 입시 문제 풀이의 기술로 평가되었다. 그나마 대입 시험에 선택된 과목은 수업이라도 배정된 데 반해 입시 비주류 과목은 편성에서 제외되거나 자습으로 때우기 일쑤였다. 이런 과밀과 공허의 이분법은 인간을 우열로 나누는 무서운 구조를 고착시켰다. 우등생이 문제집 풀이에 집중하는 동안 열등생 대부분은 교실에서 잠을 잤다. 양극화는 인문계와 비인문계라는 고교 유형으로도 나타나 한쪽이 과열로 인한 파행이 성행했다면, 다른 쪽에서는 무기력과 냉소가 가득한 부실이 만연했다. 인문계 고3은 바둑판처럼 가로세로 서열화된 대입 배치표로 자기 등급을 매기는 동안 실업계 고교생들은 온갖 비인간적 대우를 체험하며 사회에 떠밀려 들어갔다. 과도 경쟁으로 인한 고통은 모두에게 흉터를 남긴 것이다.

이러한 아픈 기억에도 기성세대 다수가 수시를 축소하고 자기 때처럼 정시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집단적 퇴행 이면에는 경험하지 못한 미래에 대한 짙은 불안이 깔려 있다. 이들 가운데 고교 시절 협력과 나눔, 배려를 체험한 이는 거의 없다. 입시 상담을 위해 만나는 학부모 다수는 자식이 처한 어려운 상황이 교육 제도의 모순으로 인해 가중되었다고 호소하면서도 자신의 세대와 달리 동아리 활동이나 봉사활동, 진로 탐색, 다양한 발표 등이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한다. 내신 성적을 위해 학교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거나, 수능에서 선택하지 않은 과목도 공부하는 풍경 역시 기성세대는 체험하지 못했다. 만약 정시 위주로 입시제도가 돌아간다면 이 모든 긍정적 변화는 사라진 채 고교 현장은 다시 과열 경쟁과 소외만 남을 것이다.

학종, 혹은 수시가 귀족 전형이라는 근거는 일부 인정된다. 사실상 부모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특기자 전형이 남아 있고, 선발 방식의 공정성 역시 국민적 신뢰라는 기준에는 미흡하다. 한국 교육의 근원적 문제인 입시병을 해소할 만병통치약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수능 위주로 돌아간다고 공정성이 확보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 풀이를 위해 투자되는 자원의 격차는 빈부 격차만큼이나 크다. 무엇보다 비인간적인 과거로의 퇴행만 가속화될 것이다. 학종이 불공정으로 차별을 심화할 것이라는 지적은 뒤집어 해석하면 학종이 활용하기에 따라 기회가 제한된 많은 학생들의 가능성을 살리는 제도라는 방증이 된다. 내신과 수능의 절대평가라는 토대에서 학생들을 바라보는 다양한 기준이 마련된다면 입시 공정성 문제는 상당수 해소될 수 있다. 교육 소외 지역에서 명문대를 가고, 세계적인 학자와 기업인을 배출하고, 장기적으로 과열 입시로 인한 부작용도 완화할 수 있다.

오랜 기간 한국인은 입시에서 심한 정신적 상처를 입었다. 수시 전형에 대한 혐오를 표현하는 대중의 반응에서 이러한 상흔이 남긴 분노와 두려움이 드러난다. 자식에게 고통이 전이될 것이라는 우려에 반응은 더욱 날카롭다. 미래를 위한 변화는 불가피하나 반대하는 이들의 두려움 또한 헤아려야 한다. 이는 잔인한 어제가 남긴 오늘의 고통이다.

<정주현 | 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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