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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앞둔 아이 마음이 이 정도였을까. 제발 비는 내리지 말아달라고 기원하는 마음이 절절했다. 4월22일과 23일, 이틀간의 ‘광화문광장 축제’는 매력적인 책의 행사로, 제대로 치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만 내리지 않는다면 축제를 위해 하룻밤 사이에 깔아놓을 천연 잔디밭 위에 실컷 누워볼 작정이었다. 누워서 책을 펼쳐보리라, 광화문 하늘을 덮고서 말이다.

매년 4월23일 전 세계가 행사를 치르는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을 올해는 ‘2018 책의 해’를 기념하여 조금 새롭게 기획하였다. ‘2018 책의 해’ 집행위원장을 맡은 나는 잠시 본분을 잊고, 챙겨야 할 일에 대한 의무보다 설레는 독자의 심정으로 행사들을 살펴보곤 했다.

독특한 독립출판물과 색깔 있는 큐레이션으로, 재밌는 아이디어를 주던 독립책방 스무 곳이 광화문광장에 각각 부스를 차렸다. 또 생생한 책 이야기를 들려주던 네 군데 팟캐스트 녹음이 오픈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다. 보이는 라디오처럼, 진행자의 생생한 표정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페이스북 생중계를 하고 있는 독자도 있었다.

유네스코가 세계 시민들의 독서와 출판 장려, 그리고 지적소유권 보호를 위해 제정한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이 4월23일로 정해진 이유는 셰익스피어의 사망일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와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 4월23일에 책을 많이 읽는 사람에게 꽃을 주는 풍습에서 따왔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오늘, 광화문광장에서는 423명의 독자가 책과 장미를 선물 받는다.

책과 관련된 낭독회, 공연도 무대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봄의 운치라고나 할까, 책을 둘러싼 광화문 풍경은 역시 그윽했다.

그러나 역시 아쉬움은, 이틀 동안 햇살 받으며 잔디밭을 마음껏 누릴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번 광화문광장 축제 이름은 ‘누구나 책, 어디나 책’이다. 삶이 있는 곳에 책이 있고, 책이 있는 곳은 어디나 도서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행사명을 정했다. 잔디밭이 깔린 곳은 ‘라이프러리’와 ‘북그라운드’인데, 여기에 책 3000권이 장르별로 자연스럽게 꽂혀 있다. 누구나 원하는 책을 뽑아서 읽어볼 수 있다. 물리적으로도 ‘열린’ 도서관, 새로운 경험이 분명하다.

‘라이프러리’라는 조어는 ‘삶의 도서관’이란 뜻을 지녔고, ‘북그라운드’는 ‘책 놀이터’란 뜻이다. 아이들이 책과 함께 노는 법을 잠시나마 체득하며, 책을 생활 속으로, 삶의 깊은 안쪽으로 끌어들일 계기를 가져본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싶은 심정으로 기획한 것이다.

축제일을 앞두고 지속적으로 일기 예보를 보며 우천 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광화문광장 축제 기획 초기의 큰 그림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었고 전체 디자인의 일관성이 흐트러졌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날씨는 우리 삶의 일부다. 비가 내려도, 햇살이 내리쬐어도 삶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은 소망이지만, 비가 내렸기에 볼 수 있는 풍경도 있는 것이다.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입고 독립책방을 기웃거리거나 무대 위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이, ‘라이프러리’와 ‘북그라운드’에서 잔디밭의 냄새를 맡은 독자는 광화문광장의 오늘을 새롭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에 편입시키게 된다.

‘2018 책의 해’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치를 것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언제나 이렇게 답했다. 단기간 행사가 아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는 동안, 독자가 자신의 인생 이야기에 ‘책의 해’ 사업을 하나라도 끼워넣을 수 있다면 아름다운 일이다. 성공을 이야기하지 말고 책과 함께한 이야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들려주고 싶다고.

광화문광장에서 다시 생각했다. 여기 한 사람, 또 저기 한 사람, 지나치는 사람들은 서로 모르지만 낯설지 않다. 책 축제에 모인 사람들은 책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진다. 책의 가치를 공유하는 순간의 따스함이 서로에게 전달된다.

오늘이 끝나면 올해 광화문광장 축제 현장의 풍경은 기억 속으로, SNS의 이미지로 남겠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비가 내려서, 축제를 기획할 땐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에피소드도 많이 생기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이야기가 풍성해질 수 있다.

광화문광장의 잔디밭에 마음껏 몸을 누이지 못했지만, 아마 집으로 돌아간 나는 책방에서 구입한, 한 걸음 뗄 때마다 책이 늘어나 무거워진 가방을 내려놓고 방바닥에 조용히 누울 것이다. 책 축제의 풍경을 천장에 눈으로 그려가며, 천천히 음미하게 될 것이다. 결코 혼자가 아니었던, 우리 모두의 축제였던 공간을.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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