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학기말을 맞아 학생들이 2차 지필고사 성적과 수행평가 점수를 합산한 2학기 종합 성적표를 받았다. 교과 담당교사가 최종 성적표를 가지고 들어가 학생들에게 점수 확인을 하고 사인을 받는다. 교사들에게는 학생들의 여러 반응을 통해 1년간 가르쳐온 수업과 학생들에 대한 만감이 교차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전에 찬우(가명)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마지막 학기 53점에 6등급을 받았다. 그는 자기 성적을 보고 기쁨의 탄성을 질렀고 나도 그와 손뼉을 마주치며 같이 기뻐했다. 그는 평소 한문 공책을 들고 나를 찾아와,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질문을 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가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면서 몇 가지 질문을 해서 그가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알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점차 이해하는 것이 늘어났고, 처음에는 거의 알아볼 수 없었던 글씨도 조금씩 반듯해져 갔다. 시험이 다가오자 깨알같이 적은 종이를 들고 다니며 한자를 외웠다. 그 결과로 받은 이 점수는 그가 지금까지 학교생활 중에 받아본 적이 없는 최고의 점수였다.

찬우는 개념과 의미를 이해하는 데 보통의 학생들보다 어려움이 많았는데, 사물의 모습을 담은 상형문자라는 한자의 특성이 그의 특별한 주의와 관심을 끌었던 것 같다. 그는 한자의 모양을 보면서 뜻과 연결짓고, 관련 단어를 떠올리는 방식으로 한자를 한 글자씩 외웠다. 어떤 학생이 특별한 관심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안다는 것은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어쩌면 찬우에게는 한자가 세상을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신호이자 통로였을지도 모른다.

예은(가명)이도 성적이 상위권은 아니었지만, 늘 맑은 표정으로 수업에 집중하면서 작은 것이라도 정성스럽게 배우는 학생이었다. 그의 학기 말 성적은 68점에 4등급이었는데 나는 그가 받은 점수가 못내 안타까웠다. 그런데 그는 자기 점수를 확인하더니 “음, 나쁘지 않네” 하고 편안히 웃으며 사인을 했다.

예은이의 말은 학생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을 돌아보게 했다. 그래, 그의 말처럼 우리 각자의 존재와 삶이 생각만큼 그리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어차피 다 1등급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1등급만 행복하란 법도 없다. 오히려 행복은 허용의 능력이다. 찬우는 찬우가 가진 것을 가지고 찬우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고, 예은이는 예은이가 가진 것을 가지고 예은이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교육을 통해 세상의 희망을 꿈꾸는 것도 이와 같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장 알맞고 편안한 서식지를 찾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희망을 현실에서 이루어내려면 먼저 우리 각자가 교육에 있어서의 ‘개별성과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교사와 부모, 학교와 사회가 우리 안의 획일적인 욕구와 평가 기준을 내려놓고 서로 어떻게 다른지 주목하면서 각자에게 알맞은 것을 찾아갈 수 있도록 서로를 ‘허용하는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도우며 축복해주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디태치먼트>에서 교사 헨리가 “교육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한 말은 내가 알고 있는 교육에 대한 가장 아름답고 따뜻한 명제이다.

이제 학생들은 긴 휴식과 충전에 들어간다. 이 땅의 모든 찬우와 예은이를 응원하며, 그들에게 2020년이 행복한 자기 삶의 서식지를 발견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조춘애 광명고 교사>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