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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부종합전형(학종)은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지금 모습으로선 오래 못 갈 것만 같다. 약점이 너무 많다. 그래도 사라진다면 미련이 클 것 같다. 왜?
예전에 수업준비를 하다가 답답한 마음에 페이스북에 이런 하소연을 올린 적이 있다. “EBS 수능특강, 문제풀이 책이라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긴 하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수업 준비하는 동안 육두문자를 수십 번 내뱉을 뻔했다. 내가 이렇게 죽도록 재미가 없는데, 도대체 애들은 어쩌란 말이냐!”
EBS 교재가 아니더라도 문제풀이 수업이 재미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교과서를 분석하고 해설하는 수업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변화를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하지만 학종으로 인한 변화는 좀 다르다.
지난해 나는 고3 수업을 했다. 여전히 문제풀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것만 할 수는 없었다. 문제풀이 수업만으로는 학생부의 교과세부능력 특기사항을 풍부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학종을 위한 새로운 수업을 해야만 했다. 대단한 수업을 했던 것은 아니다. 나 자신이 교과서 해설과 문제풀이 위주의 수업에 찌든 사람이라 대단히 창의적인 수업을 할 능력이 없었다. 학생들에게 책을 읽게 한 후 감상을 발표하게 하는 단순한 수업에 불과했다. 모든 게 어설펐다.
어설픈 것치곤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참여도가 생각보다 높았다. 살짝 섭섭한 마음마저 들었다. ‘아 이놈들이 나의 설명보다 친구들의 발표를 훨씬 더 재미있게 듣는구나!’ 학생부에 기록하기 위해 나도 경청했다. 무엇보다 학생 한명 한명의 생각과 개성을 잘 알게 되어 좋았다. 나 혼자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수업에서는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세상에 고3 교실에서 이런 수업을 할 수 있다니! 묘한 흥분을 느꼈다. 그동안 선각자적으로 수업의 변화를 꾀한 교사들이 왜 학종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는지 절실하게 이해됐다.
내친김에 여름방학 보충수업에서도 새로운 수업을 시도했다. 고3 보충수업임에도 불구하고 문제풀이에서 완전히 벗어난 수업을 시도했다. 그 사실을 미리 학생들에게 분명히 알렸다. 그런데도 학생들이 제법 신청을 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우리 학교의 특수성도 작용했겠지만 아무래도 학종이 만들어낸 분위기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그 수업은 내가 해본 시(詩) 수업 중 제일 재미난 수업이었다. 무엇보다 내 평생 수업준비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인 적이 없었다. 억지로 그런 게 아니라 하다 보니까 재미있어서 그렇게 됐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흐뭇한 수업 중의 일화가 있다. 한 학생이 이대흠 시인의 ‘아름다운 위반’을 낭송하고 감상을 말하다가 그만 울컥해서 눈물을 흘린 일이다. 예전 수업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물론 이러한 경험을 근거로 학종으로 인한 변화의 가능성을 과장해서는 곤란하다. 학종의 한계는 뚜렷하다. 무엇보다 학종을 떠받치는 중요한 토대인 현재의 학교내신제도는 수업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수업에 미치는 학종의 긍정적 힘을 무시하는 것은 소중한 것을 놓치는 일이다. 입시로서의 학종은 약점이 많다. 그러나 학종이 사라지더라도 학종이 만들어낸 긍정적 변화의 가능성만은 어떻게든 살려 나갔으면 좋겠다. 그런데 학종이 아니고서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이기정 | 서울 미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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