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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문화와 소비의 시대인 1990년대는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의 수위가 고조되던 시기였습니다.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자마자 책 제목에 가장 많이 들어간 단어가 ‘나’였으니까요. 이 시기를 가장 압도했던 사상은 아마 ‘페미니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른바 ‘공격적 페미니즘’ 소설이 출판시장을, 젊은 여성의 마음을 뒤흔든 것은 1992년이었습니다.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경자의 <혼자 눈뜨는 아침> 등은 ‘사랑(결혼)’이라는 전통적 가치보다 ‘일’이라는 자기실현을 중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후 소설 속에서 여성의 ‘지위’는 나날이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천년 동안 못다 이룬 사랑을 완성하려는 연인의 슬픈 사랑 이야기인 양귀자의 <천년의 사랑>이 등장한 것은 1995년이었습니다. 이때 하병무의 <남자의 향기>, 김상옥의 <하얀 기억 속의 너>, 백금남의 <천상의 약속> 등 남자로부터 무한사랑을 독차지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상한가를 쳤습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여성들은 드디어 남자를 ‘고르기’ 시작합니다. <모순>(양귀자)의 25세 주인공 안진진은 ‘몽상’과 ‘현실’을 상징하는 두 남자를 저울질하다가 ‘현실’을 선택합니다. “애인이 셋 정도는 되어야” 사랑에 대한 냉소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의 주인공 진희는 바람처럼 가볍고 분방한 사랑을 추구합니다. 


21세기는 ‘여성의 시대’입니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을 정도로 지위가 오른 여성은 최상의 멘토로 자기 자신을 설정하기도 하고, 여자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실천 매뉴얼을 열심히 익혔습니다. 때마침 알파걸, 골드미스 등 이들을 칭송하는 신조어도 끊임없이 등장하면서 비혼주의자도 늘어났습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경향신문DB)


<브리짓 존스의 일기> <섹스 앤드 더 시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 젊은 여성을 위한 문학이라는 ‘칙릿’이 큰 흐름을 이룬 것은 2000년대 중반입니다. 영상화된 이 소설들은 런던, 뉴욕, 맨해튼 등 대도시에 살며 세상의 흐름을 주도하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20~30대 미혼여성들의 세속적인 욕망과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거침없이 보여줬습니다. 이런 흐름이 국내에도 자연스럽게 이식됐습니다.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와 백영옥의 <스타일>은 드라마로도 방영되었습니다.


선두에 서서 거친 세파를 온몸으로 막아내던 알파걸들의 피로감이 극도로 치솟아서일까요? 지극히 반페미니즘적인 소설 하나가 세계를 강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E L 제임스, 시공사) 시리즈는 시간당 10만달러쯤 버는 27세의 억만장자 크리스천 그레이와 대학을 갓 졸업한 21세의 아나스타샤 스틸의 파격적인 사랑을 관능적인 묘사로 그려낸 소설입니다. ‘엄마들을 위한 포르노’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이 소설에는 다양한 섹스 장면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저커버그와 빌 게이츠를 합쳐 놓은 듯한 하버드 중퇴의 천재사업가인 크리스천 그레이는 섹스로 여자의 몸을 완전히 소유해버리는 마법의 소유자입니다. 아나는 “아름답고 죽이게 섹시하고 부자이며 고상하지만 한편으로는 천박한” 그레이에게 점차 빨려 들어갑니다. 그레이는 채찍과 체벌까지 동원한 섹스를 받아들이는 아나에게 “넌 내게 희망을 줬어”라고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네 살 때 ‘약쟁이 창녀’인 엄마를 잃은 크리스천 그레이는 아버지가 누군지 모릅니다. 부부가 변호사와 소아과 의사인 집으로 입양됩니다. 그 집에는 입양된 형과 누이가 있었는데 다섯 식구 모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습니다. 아나의 어머니는 ‘불치의 낭만주의자’로 네 번째 남편과 삽니다. 친아버지는 아나가 어릴 때 돌아가셨고, 아나는 의붓아버지를 엄마보다 더 의지합니다.


크리스천 그레이는 15세부터 엄마 친구인 중년 여성에게 온갖 성적 학대를 당합니다. 그는 그 고통을 아나에게 되돌려주는 셈이지요. 이들의 로맨스는 오로지 섹스로만 이뤄집니다. 이렇게 성에 지배당하는 ‘섹스 판타지’를 20~30대 여성, 특히 도회적이고 교육받고 진취적인 여성들일수록 더 열렬하게 읽는다고 합니다. 이 소설이 유행하면서 ‘성적 복종’이라는 욕망이 하나의 확고한 주제로 떠오른다고 하네요. 


아마존닷컴 사상 최초로 전자책으로 밀리언셀러가 된 이 소설은 종이책으로 인기가 옮겨 붙어 석 달 만에 2100만부나 팔렸습니다. 일본에서는 온라인서점 등장 초기에 <세상에서 제일 쉬운 섹스 어매이징 강좌>가 온라인서점에서 먼저 인기를 끌고 결국 오프라인 서점에서도 불이 붙었지요. 그렇다면 억눌려 있던 ‘섹스 판타지’에 대한 잠재적인 욕망이 디지털 기술에 힘입어 드디어 폭발하는 것일까요? 


자본 증식을 위해서라면 못하는 것이 없는 과학문명에 대한 절망감과 합리적 이성에 대한 신뢰감 붕괴로 말미암아 인간의 관심이 ‘몸’과 ‘마음’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9·11 테러 직후입니다. 지루한 일상에서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개인이 힘겨운 현실에 대한 절망감으로 ‘몸’에 대한 욕망을 키웠다지요. 시대를 거꾸로 가는 ‘섹스 판타지’의 대단한 인기는 굴욕적인 섹스가 ‘해방(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의 증거일까요? 한때 세상을 주도했던 페미니스트들에게 꼭 한 번 던져보고 싶은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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