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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를 다시 읽었습니다. 가상의 전체국가인 오세아니아를 지배하는 ‘빅 브러더’는 독재권력의 극대화를 꾀하면서 정치권력을 항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텔레스크린, 마이크로폰, 사상경찰, 스파이단 등을 이용해 철저한 사상통제를 자행합니다. 방, 거리, 광장 등에 설치되어 있는 텔레스크린과 산이나 야외에 숨겨져 있는 마이크로폰은 시민의 모든 행동을 철저하게 감시합니다. 어린이로 조직된 스파이단은 부모의 대화나 행동, 심지어 잠꼬대까지 엿듣고 사상경찰에 고발하도록 훈련받습니다. 


오세아니아의 통치주체는 ‘당’입니다. 만능인 ‘당’이 말하는 것은 무조건 진실이며 사실입니다. 당은 과거의 사실을 끊임없이 날조하고, 새로운 언어마저 만들어 생각과 행동을 속박합니다. 개인은 당이 말하면 것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합니다. 당이 2+2는 4가 아니라 5라 해도 말입니다. 그걸 ‘이중사고’라고 하지요. 심지어 당은 인간의 성욕마저 통제합니다. 


 조지 오웰이 1949년에 발표한 <1984>는 국내에는 1968년에 출간되었지만 별 반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984년이 가까워지면서 언론에 스탈린과 히틀러 시대 이상의 전체주의가 1984년을 지배한다는 조지 오웰의 예언이 한국의 정치 상황에 맞아떨어진다는 기사가 자주 게재되면서 판매가 급증해 베스트셀러에 올랐지요.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고 집권한 ‘5공 정부’를 <1984>의 ‘당’과 다름없다고 본 것은 틀린 지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연말 대선의 지지율 선두를 달리는 박근혜씨는 항구적인 권력을 추구한 아버지의 쿠데타가 정당하다며 역사 왜곡을 꾀합니다. 이명박 정권도 민간인 사찰을 광범위하게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5공 정부’에 비하면 약과입니다. 소셜미디어가 일반화된 지금 그런 통제는 저항만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폭압적인 정권이라 해도 정치권력은 집권기간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권력이 국가권력을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자본권력이야말로 항구적인 권력을 추구합니다. 국내 최고의 한 기업은 노동조합의 설립을 결코 허용하지 않습니다. 직원들이 백혈병으로 줄줄이 죽어가도 산업재해를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기업의 홍보를 위해 언론인을 끊임없이 영입하고 있습니다. 대형로펌인 김앤장의 변호사가 160명에 불과하지만 이 기업에는 변호사가 700명이나 활동하고 있답니다. 지적재산권 문제가 첨예한 시대이긴 해도 과연 700여명 모두 그런 분야의 전문가인지는 확인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런 기업이 과연 오세아니아의 ‘당’보다 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일러스트 _ 김상민


▲ 자본권력이 국가권력을 지배하는 시대

상업적 감시보다 무서운 기술적 감시

인간은 ‘파놉티콘’에 갇힌 신세로 전락


<감시사회-대한민국에서 벌거벗고 살아가기>(한홍구 외, 철수와영희)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최철웅은 기업들의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구축한 ‘상업적 감시’ 체제가 벌이는 일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을 수도 있다고 경고합니다. 은행, 보험회사, 자동차 회사, 대형마트, 휴대전화 회사 등이 확보한 개인정보는 언제든 개인의 목을 옥죌 수 있습니다. 개인 정보의 ‘상품화’ 시대가 되다 보니 개인이 사용하는 카드정보만 추적해도 개인의 일상을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어 상업적 감시의 위험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새누리당의 ‘돈 공천 파문’도 내부의 고발이 있긴 했지만 ‘상업적 감시’ 시스템 때문에 실체가 조금이나마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상업적 감시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기술적 감시’입니다. 폐쇄회로(CC)TV는 텔레스크린의 수준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은 언제든 자사가 확보한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개인의 성향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푸코가 창안한 개념인 파놉티콘에 갇힌 처지로 전락했습니다. 


일망감시체제를 갖춘 원형감옥인 파놉티콘에서는 간수는 보면서 보이지 않지만, 수인은 볼 수 없으면서 일방적인 보임만 당합니다. 수인은 간수가 보지 않고 있어도 간수의 눈 또는 권력의 시선을 통해 내면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인터넷의 익명성이 누리꾼들의 조사로 권력자들을 감시하는 시놉티콘이 가능해지긴 했지만 그런 순기능보다 개인이 트위터, 블로그, 페이스북 등의 소셜미디어를 통한 사생활 노출로 인한 자발적인 감시체제로의 편입이라는 역기능이 더 큽니다.


원래 정보기술은 돈과 정보의 민주화와 균형 있는 욕망의 해방을 가져올 것으로 예측됐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대기업에 의한 돈과 정보의 독점과 쾌락의 끝없는 중독만 확산되고 있습니다. 정보기술은 관련 분야의 숙련노동자를 소프트웨어로 대체하고 있어 ‘고용 없는 성장’을 낳고 있습니다. 


국가권력기관들은 대기업의 수하에 놓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고용 없는 성장’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대기업의 상업적인 기술적 감시의 노예가 되는 처지로 전락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끔찍한 디스토피아입니다. <1984>의 ‘당’을 대기업으로 치환하면 우리의 미래는 이렇게 끔찍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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