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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작은도서관’이란 잡지를 기억하실지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2007년 말에 4호까지 펴내고 중단된 잡지입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 권양숙 여사는 작은도서관 운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작은도서관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예산도 점차 늘어났지요. 그러나 이명박 정부 인수위는 작은도서관 지원 예산이 ‘권양숙 여사’ 예산이라면서 전액 삭감해버렸습니다. 아마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 사건은 이명박 정부가 출판계에 안겨준 재앙의 시초일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명박 정부의 ‘김윤옥 여사님’ 예산은 한식 세계화로 바뀌었습니다. ‘4대강 사업’처럼 한식 세계화는 혈세만 낭비하고 아무런 소득도 남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출판계에 안겨준 본격적인 재앙의 시발점은 ‘일제고사’ 도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90년대에 우리 아동출판은 급격하게 성장했습니다. 1990년대에 우리 출판계는 장기간의 군사정권이 지배한 이 땅에 바람직한 아동서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환경을 바꿔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책,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즐거움을 전하고 억지웃음을 강요하는 TV와 연결된 즉물적 기획상품, 공포물, 유머(?) 소화류(笑話類) 등의 아동서적이 서점 서가의 대부분을 장악했습니다.

1990년대 아동출판의 성장은 세계 저작권협약(UCC) 가입과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에 따른 저작권 개념의 명확한 확립,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의 아동출판 대거 진입, 386세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좋은 책을 골라 읽히려는 열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합법화에 따른 학교 현장의 긍정적 변화, 좋은 책을 골라 읽히려는 시민단체들의 노력, 아동서적 전문 서점과 전문 도매상의 등장, 일간신문의 아동서적 소개면 신설 등에 힙입은 바 큽니다. 이 시절에 좋은 그림책을 읽고 자란 세대가 그림책 작가가 되어 지금은 세계적인 그림책 관련 상을 해마다 수상하고 있기도 합니다.

일제고사는 학교 현장을 압박했습니다. 그 바람에 아동출판은 해마다 30%씩 매출이 격감하기 시작했습니다.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도 동반해서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학교도서관에는 시설과 자료(책) 이상으로 사서교사라는 전문 인력이 필요합니다. 2006년 109명, 2007년 104명, 2008년 109명 등 3년간 총 367명의 사서교사 신규 임용이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2009년 9명, 2010년 24명으로 급격하게 줄었습니다. 2011년에는 단 한 명도 뽑지 않았고, 2012년에는 결원보충으로 전북에서 딱 한 명만 뽑았습니다.

 

파주 출판단지를 찾은 가족 ㅣ 출처:경향DB

2010년 4월26일,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유인촌 장관은 국내 시판도 되지않은 아이패드를 이용해 ‘전자출판산업 육성방안’을 발표했습니다. 근본적인 시스템 조성을 위한 방안이 없이 그저 곁가지 대책만 나열하면서 5년동안 600억원을 투입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예산 확보없이 발표한 것이라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올해는 ‘국민독서의 해’입니다. 강단학자들에게 수천만원을 주고 만든 몇 가지 이벤트가 진행됐습니다. 그러나 이 행사에 문화부가 투입한 전체 예산이 국민 1인당 10원에 불과한 5억원이었습니다.

최광식 문화부 장관은 지난 7월9일 “한류 확산을 위해 앞으로 유형은 물론 무형의 산업에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며 내년 50개 사업에 5000억원 규모의 예산을 확보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영화나 게임 산업, K팝 등의 문화산업을 지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모든 문화산업의 근간인 출판에 대한 홀대는 이명박 정부 내내 너무 심화됐습니다.

지난 18일, 정부는 출판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을 출범시키면서, 초대 원장에 이재호 동아일보 출판국장이 내정됐다는 사실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출판에 문외한인 특정 대학 출신의 보수 언론인을 낙하산으로 내려보냈습니다. 인사 발표 후 반발하는 출판단체를 찾아온 박영석 문화산업국장은 “출판계가 이렇게 반발하면 출판계만 손해”라고 협박했다고 합니다.

출판계가 더 손해 볼 것이 남아 있나요? 어차피 망할 수밖에 없는 출판인들이 ‘낙하산 인사 규탄 및 출판문화 살리기 실천대회’를 벌인 것이지요. 그들은 원장 자리 하나 꿰차지 못해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낙하산 인사가 도화선이 되어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정부의 홀대에 출판인들의 분노가 드디어 폭발한 것입니다.

온라인서점의 할인 경쟁이 가속화된 다음 출판계는 뒤늦게 도서정가제만이 출판 산업이 살기 위한 최소안의 안전장치라고 수없이 아우성쳤습니다. 하지만 문화부는 도서정가제가 필요하다는 원칙에는 공감하면서도 공정위나 규제개혁위의 반대를 핑계로 문제를 봉합하는 데 급급했습니다. 그 바람에 서점의 휴·폐업이 속출하면서 출판시스템은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다소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이제야 출판인들은 한마음으로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낙하산 인사 철회뿐만 아니라 도서정가제 확립,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수준의 도서관 장서구입 예산 확보, 독서진흥기금 조성, 학교 독서교육의 강화, 출판유통의 현대화 등을 위해 열심히 싸우기로 했습니다. “한숨 대신 함성으로, 걱정 대신 열정으로, 포기 대신 죽기 살기로”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말입니다. 양서 출간이 늘어나기를 기대하시는 국민들의 많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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