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금방 전쟁을 벌일 것 같던 북한과 미국이 8·15를 전후해서 다른 행보를 시작했다. 미 국무·국방장관이 지난 13일 월스트리트저널 공동기고에서 북핵의 외교적 해법을 시사했다. 14일 김정은 위원장은 ‘괌 포위사격 계획’을 보고받고 “미국의 행태를 좀 더 지켜보겠다”고 했다. 한편 21일 시작된 금년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은 당초 계획보다 병력을 30%나 줄여서 시작했고 미군 전략자산도 투입하지 않았다. 22일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미국을 존중하기 시작했다”는 발언을 했다.

국제관계에서 행위자들의 움직임을 시계열적으로 연계분석하면 정세의 큰 흐름이나 변화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북·미가 ‘화염과 분노’니 ‘괌 포위사격’ 같은 말폭탄을 쏟아내던 바로 그 시간에 북·미 외교관들이 물밑접촉을 하지 않았다면 이 같은 대전환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북·미는 작년 10월부터 1.5트랙 대화를 제3국에서 해왔고 뉴욕에서도 북·미 유엔대표부 간 비공개 접촉을 계속했다. 8월15일경 북한 유엔대표부 고위관계자가 워싱턴을 방문했다는 소문도 있다. 북·미 간 물밑접촉이 여기까지 진전되었기에 트럼프의 ‘존중론’과 틸러슨의 ‘대화경로 모색’과 같은 발언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돌발사고만 나지 않으면 북·미 간 물밑접촉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건 시간문제다. 북핵 6자회담이 열릴 가능성도 그만큼 커졌다. 물론 북한은 단거리 발사체 발사와 같은 저강도 무력시위는 전략상 계속할 것이다. 문제는 회담재개의 조건이다.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보여야 6자회담을 시작할 수 있다는 기존입장을 미국이 계속 고수한다면 회담은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은 2015년과 2016년 초, 자신들이 핵개발을 동결할 테니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하고 6자회담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중국 왕이 부장이 이걸 쌍중단이라 이름 붙였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출범 후의 첫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다. 쌍중단으로 넘어갈 수 있는 디딤돌이 마련된 것이다. 군사훈련 ‘규모 축소’와 북한의 핵·미사일 ‘시험 유예’를 조건으로 6자회담을 시작하고, 진전 상황을 봐가면서 쌍중단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후 비핵화와 평화협정 문제를 투 트랙으로 타결해 가는 쌍궤병행으로 나가야 한다. 사실 쌍궤병행은 2009년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3번(2, 7, 11월)이나 언급한 북핵 문제 해법과도 통한다.

8월27일 북한은 노동신문 논평에서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을 ‘헛소리’라고 험담했다. 남한과는 핵 문제 논의할 일이 없을 것이니, 남북관계에 대한 입장이나 바로 세우라고 요구했다. 아마도 북·미 간 물밑접촉에서 희망이 보이니까 자신감이 넘쳐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북한이 못 보고 있는 중대한 측면이 있다. 한국이 현실적으로 핵 문제에 대한 결정권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미국이 유연하게 북한과 협상하도록 권고할 수 있는 힘은 물론이고, 6자회담을 성공적으로 진전시키는 데 한국의 역할은 절대 필요하다. 한·미 동맹을 토대로 미국의 대북정책을 조율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한국 빼고 북핵 6자회담은 성공할 수 없다. 북한은 이걸 알아야 한다.

동북아의 국제정치구조상 한국이 운전석에 앉아야 북한에도 유리하다. 운전석에서 시동을 걸려면 남북관계를 복원해야 한다. 9월 이후 새로운 정세 흐름이 나타나면, 추석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 개최를 재촉구하는 것이 좋겠다. 문재인 정부가 실제로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시키려면 북한이 회담 개최 조건으로 내건 ‘김련희와 류경식당 여종업원 송환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매듭지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문재인 정부 임기 내내 이산가족 상봉은 물론이고 남북대화의 물꼬도 트기 어려울 수 있다. 남북관계를 복원하고 한반도 운전석에 앉기 위해서는 문재인 정부가 대승적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황재옥 | 여성통일외교포럼 대표>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