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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회피하고자, 생활세계를 설계하고 구성하자는 전략과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전복하고 넘어서자는 전략은 애초에 틀거지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 ‘잘못된’ 자본주의를 새로 고치고 바로잡자는 전략이 운동, 그것도 진보 좌파의 전략으로 대두하고 있다. 그것도 국내와 전 세계적으로 말이다.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심히 우려스러운 반자본주의담론 회피 전략이 아닐 수 없다. 급기야 한국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한 경제학자의 기괴한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는 한국의 자본주의를 정말 자본주의답게 만들자고 말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일 뿐이다. 자본주의에 왜 규범적인 태도를 취하나? 나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착한 자본주의를 꿈꾸는 것이다. 아니면 자본주의의 문제를 반자본주의가 아닌, 비자본주의적으로 회피해보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어떤 ‘생활세계’를 구축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자본주의와 이 생활세계는 어떻게 연계되는가’라는 문제에 봉착하고 만다. 이는 재벌 사내유보금 환수도, 기본소득도, 재벌체제 개혁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기에는 당연히 반대와 긍정이 있다. 반자본주의 담론은 요즘 거의 고사상태이므로 후자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좋은 자본주의는 긍정하고 심지어 사회운동은 좋은 자본주의 만들기에 복무하자는 최근의 흐름은 자본주의 앞에서 일종의 사상적·정치적 무장해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와 상생하고 자본주의를 회피하고 심지어 자신의 ‘대안’이 바로 자본주의 살리기라고 말하는데, 이게 자본주의 앞에 무장해제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삼성 바로잡기”라는 한국 노조운동의 프레임을 예로 보자.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묘하다. 삼성을 바로 고쳐서 좋은 재벌을 만들자는 것인가? 아니면 기업이 공공재라는 것인가? 기업이 공공재라면 그럼 국유화 아니면 사회화된 것인가? 제 아무리 좋은 기업도 자본주의 사적 소유를 벗어나지 못한다.

즉 아무리 망해가는 기업을 살려놔도 그것은 누군가의 소유로 된다. 혹은 아무리 나쁜 기업을 좋은 기업으로 만들어놔도 그것은 누군가의 것이다.

우리는 이미 IMF 외환위기 때 경험했다. 국가는 수십조원을 들여서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의 인수·합병 매각을 단행하고, 그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세금을 퍼부었다. 그렇게 인공호흡하여 살려낸 기업은 헐값으로 팔려나갔다. 단지 기업을 ‘경영’할, 아니 ‘소유’할 주체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거의 0원으로 팔려간 기업도 있었다. 그 기업을 얻은 자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한국 자본주의도 더 막강해졌다. 마찬가지다. 삼성을 아무리 바로 고쳐봤자 그 소유의 끝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근데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를 새로운 재벌 반대운동이라고 실천하고 있다. 아마 누군가는 희색이 만면할 것이다. 족벌자본, 1인 소유의 재벌을 바꿔서 체질 개선하고 합리화시키면 그것으로 배당금 더 받고 주가 더 올리고, 그리고 1인 소유의 기업을 탈피해 주주자본주의, 관리자본주의의 이익을 다 함께 누릴 수 있다, 단 공유한 사람들끼리. 일단 이것부터 성취하고서 다음 대안을 말하겠다고? 재벌을, 아니 자본주의를 좋은 자본주의 대 나쁜 자본주의로 규범적으로, 아니 가치 판단의 대상으로 삼아버리고서 어떻게 반자본주의가 가능할까?

문제는 요즘 나온 이른바 대안 전략들 대다수가 여기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해서 이 사회 내 소수 좌파의 분발이 필요하다. 박근혜 퇴진 촛불은 ‘혁명’이라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회체제도, 정치체제도 건드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혁명이 아니다. 아마 그것은 혁명을 선제적으로 방어하는 예방혁명일 수는 있겠다. 물론 그조차 ‘혁명’ 이후 혁명의 시대가 과연 펼쳐질지에 달려 있지만. 하지만 지금은 혁명이라는 말을 하기엔 너무나 ‘반혁명’적, 즉 개량의 시대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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