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창훈 | 소설가


정말 봄입니다. 이번 겨울은 한정 없이 길었습니다. 마치 빙하기를 거친 것 같기만 했습니다. 겨울바다를 꿈꾸시는 분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섬의 겨울은 혹독합니다. 춥고 스산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 하루이틀 정도 거닐다가 돌아가는 것은 괜찮습니다. 단식도 하루 정도면 할 만하잖아요? 하지만 살아내는 것은 다릅니다.

이곳은 남쪽이라 온도가 낮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바람이죠. 겨울에 부는 북서계절풍은 살을 엡니다. 지난해 겨울, 잠시 서울에 있을 때였습니다. 똑같은 영하 10도인데 어떤 날은 제가 추위에 몸서리를 치고 어떤 날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따져보니 바람이 조금이라도 부는 날을 못견뎌하더군요. 몸이 바람에 몹시 민감하게 반응을 했던 거죠.

“이곳에 봄이 왔음을 선포하는 바이다.”

 

올해 들어 대여섯 번 정도 이 짓을 했습니다. 파도 잔잔하고 따뜻한 날에 말입니다. 제 거처는 이웃집 하나 없는 바닷가라서 스스로 영주(領主)님 같을 때가 있거든요. 개와 몇 마리의 바다직박구리, 비슷한 수의 휘파람새, 수백마리의 무늬발게, 수천마리의 갯강구가 저의 영토 속에 살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꼭 그 다음날 비바람이 몰아쳤지 뭡니까. 선포는 무효가 되고 봄은 수백리 뒤로 물러나 버렸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세상은 다시 시퍼런 한겨울로 되돌아갔습니다. 다행히 착한 신민(臣民)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민망해지곤 했습니다. 무능한 영주일수록 쓸데없는 선포가 잦으니까요. 아무튼 지난 몇 달 동안 이 남녘 섬에는 봄이 열댓번, 겨울도 그만큼 찾아왔던 것 같습니다.

원고 쓰고 있는 지금은 완벽한 봄입니다. 관광객 실은 여객선이 들락거리고 쑥은 웃자라고 개는 그늘과 햇살이 뒤섞인 곳에서 종일 좁니다. 여러분은 언제 행복하십니까? 합격, 입학, 졸업, 수상, 연애와 결혼? 아이의 웃음? 그런 것도 행복하지만 돌아보면 찰나 같아요. 좀 느긋하게, 큰 의미 없이, 일상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게 무어가 있을까요?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께서 먼저 하신 말씀이지만) 저는 날씨가 좋으면 행복합니다.

그런데, 곧 여름이겠죠?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