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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가 눈앞에 다가오자, 서울과 수도권의 중산층 일부는 시장이나 구청장 후보들이 내놓는 각종 개발 공약에 눈길을 주고 있는 모양새다. 특히 재건축과 관련된 규제 완화 여부가 주요 관심사다. 이해 당사자인 한강변 아파트의 거주자뿐만이 아니다. 아파트 한 채에 기대어 자신의 계층적 정체성을 중산층으로 갈무리하는 이들 역시 개발 공약을 눈여겨보며 머릿속 주판알을 굴려보기 마련이다. 강남 재건축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아파트 가격의 동반 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한몫 거들고 있기 때문이다. 저성장 시대의 진입을 알리는 불황 신호는 여기저기서 타전되고 있지만, 고도 성장기에 체득한 습속의 관성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에 주목해야 할 점이 한 가지 있다. 이 기대감에는 집값 상승뿐만 아니라 지금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세속적 갈망, 즉 ‘재건축’ 너머의 새로운 일상을 향한 욕망 역시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2000년대 중반에 추진된 ‘재개발’ 너머의 삶은 낡은 단독 주택이나 오래된 다가구 주택에서 벗어나 새 아파트에 안착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재건축’ 너머의 삶은 무엇일까? 단순히 낡고 작은 아파트를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 쌓아올린 좀 더 넓어진 최신의 아파트에 입주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여기에서 ‘최신’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일단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IMF 외환위기 이후 등장한 ‘탈-판상형’ 아파트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주지하다시피, 이 아파트들은 분양가 상한제를 비롯한 각종 규제 완화 덕분에 지어질 수 있었다.

아파트 매물 정보가 게시된 서울 송파구의 부동산중개업소 사무실 앞을 24일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취득세율 영구 인하 등의 조치로 지난해 하반기 이후 서울지역 아파트값 상승세가 이어지고 있다.(출처 : 경향DB)


제일 먼저 ‘탈-판상형’ 흐름을 주도한 것은 타워형의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들이었다. 이 아파트들의 차별화 전략은 ‘호텔화’로 요약될 수 있다. 갑작스러운 규제 완화로 급조되다시피 한 탓에 이 아파트들의 평면은 공간 활용 측면에서 그리 효율성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전면 채광창이 베란다의 자리를 차지했고, 대리석 마감재가 거실 벽면을 치장했으며, 아일랜드형 키친이 주방 한가운데에 놓였고, 고급 빌트인 가구들도 제 자리를 차지했다. 특히 양복 차림의 경비원들이 상주하며 방문객을 관리하는 1층 로비, 그리고 수영장과 헬스클럽 등 각종 편의 시설은 ‘호텔화’된 아파트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호텔화’의 다음 단계는 2000년대 중반에 건설된 강남의 재건축 아파트 단지 몫이었다. 이전까지 주상복합의 실내 공간에 집중되었던 시선이 이 시점이 되면, 단지 내부의 야외 공간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주차장을 완전히 지하로 밀어 넣은 터라, 지상의 빈자리를 새롭게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공간의 조경이 차별화 전략의 주요 대상으로 부상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야외 공간의 조경이 외부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자기완결적인 경험의 연속체로 연출되었다는 점이다. 생태 연못과 구름다리,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의 미니어처, 실개천과 야외 쉼터와 어린이용 카약장, 수만 그루의 관상수로 치장된 산책로 등은 확실히 건설사들이 ‘리조트’라는 탈일상의 공간을 번역한 다음, 아파트 내부의 일상적 질서로 내부화한 결과였다.

이런 흐름에서 보자면, 결국 앞서 언급한 ‘재건축’ 너머의 ‘최신’의 삶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해진다. 그것은 고분양가 시대의 아파트가 ‘호텔화’와 ‘리조트화’의 전략을 통해 당도한 새로운 일상의 영토이고, 학군과 평수에 집착하던 기존의 중산층과는 질적으로 다른 욕망의 질서이며, 거품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던 21세기 첫 십년의 유산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아파트’의 수인이나 다름없는 40대 이상의 중산층 상당수가 재건축 너머의 삶에 대해 선망의 시선을 거두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지속 가능한 대안적 삶의 모델이 개발 보급되지 않는 한, 그들은 각종 개발 공약에 휘둘린 채로 자신의 표심을 결정짓는 선거철 습속을 끝내 버리지 못할 것이다.


박해천 | 동양대 교수·디자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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