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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정희진의 낯선사이

협상?

opinionX 2014. 8. 28. 21:30

태초에 말씀이 있는 이유가 있다. 진실은 말이 있어야 존재한다. 신문에 활자화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된다. 어떤 언어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적과 동지, 이익과 손해, 정의와 부정의가 달라진다. ‘신자유주의 좌파’ 정부에서부터일까. 나는 국어 해독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녹색 성장’을 표방했던 이명박 정권이 절정일 줄 알았는데, 이제 더 이상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 아닌 것 같다.

대필과 표절은 사법적, 윤리적 범죄행위다. 그런데 사람들은 ‘스캔들’이라고 한다. 성폭력은 현행법상 명백한 범죄인데 ‘실수’라고 말한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우선인데, 왜 다들 대책위원회를 만드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고위직 인사청문회에서 주로 문제되는 사안들(투기, 탈세, 병역 비리, 학력 위조)도 범죄라는 인식이 없다. “남들 다 하는데 재수 없어 걸렸다”고 생각한다. 이런 풍조에서 “이 정도면 통과”, “털어서 나는 먼지”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범죄는 사실 유무로 결정하는 것인데, ‘이 정도’는 어디서 나온 잣대인가.

학위 논문 베끼기, 서류 조작, 폭력 사건 은폐, 뇌물 수수, 피해자 협박 등 날만 새면 전과를 쌓는 이가 있다.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지만, 주변에서 하도 비난하는 사람이 많아 잘 아는 사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이상한 일은 그의 존재가 아니라 지인들의 대응이다. 사람들은 그를 성토하면서도 결론은 언제나 “악착같이 살다보니… 언젠가 정신 차리겠지”로 ‘중지(衆智)’를 모은다. 경찰과 해당 대학에 법규에 맞는 절차를 밟도록 하면 그만인데, 신고는 하지 않고 욕만 해댄다.

우리는 도덕 불감증이 아니라 도덕의 개념 자체가 바뀐 시대에 살고 있다. 후안무치가 도덕인 시대다. 세월호는 ‘도덕의 재구성’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사건 발생, 이후 대응방식, 막말 정국까지 쇼크의 연속이지만 최근 ‘세월호특별법’에 이르러 나는 결국 인식 불능 상태에 빠졌다.

대통령이 특별법에 ‘신경’ 쓰는 것이 삼권분립 위반, 권력 남용이라는 주장은 말인지 소리인지 어이가 없다. 그것이 권력 남용이라면 부디 행사했으면 한다. 발언자의 의도된 무지이기를 바랄 뿐이다. 원래 삼권분립은 분권보다는 협치(協治)에 가까운 개념이다. 어쨌든 내가 가장 충격을 받은 새로운 언어는 여야가 혹은 정부·여당이 유가족과 세월호특별법을 “협상한다”는 말이었다.

우리나라는 의무교육 과정에서 배상과 보상의 구별을 가르친다. 국가폭력, 범죄, 천재지변 발생 시에는 피해자에게 배상이나 보상을 해야 한다. 소를 잃었으면 외양간을 고쳐야 한다. 피해는 이미 발생한 과거의 일이지만 현재 시점에서 피해를 최대한 구제(救濟)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법질서의 기본이다. 세월호 탑승자들과 그 가족의 피해는 공동체의 책임이고 이는 무조건적 당위다. 그런데, 협상이라니!

유가족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는 것과 협상은 다르다. 협상은 동급 행위자 간의 일이지, 가해자와 피해자 그것도 일방적 피해자에게 선심 베풀 듯 제안할 일도, 피해자가 쟁취할 사안도 아니다. 유가족은 아무런 의무가 없다. 타협과 협상은 힘의 균형을 합리적으로 조절하는 바람직한 정치지만, 지금 정국에서 ‘협상’은 피해자가 무슨 요구를 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정부와 여당은 앞장서서 피해자를 위로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법을 제정하면 된다.

새누리, 일반인 희생자 유족 면담 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오른쪽) 등 원내지도부와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대책위원회 대표단(왼쪽)이 28일 간담회를 하기에 앞서 묵념하고 있다. _ 연합뉴스


‘협상’은 이 문제에 대한 정부·여당과 지지 세력의 세월호를 대하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염수정 추기경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그는 지난 26일 기자간담회에서 “세월호 아픔 이용돼… 유가족도 양보할 수 있어야”라고 말했다.

나는 세월호의 고통이 이용될 만큼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공유되었는지부터 묻고 싶다. 누가 누구를 이용했는가? 같이 아파한 사람은 야당에 투표하고 그로 인한 여당의 아픔(?)이 안타까운 이들은 여당에 투표했다. 덕분에 여당은 지방선거에서 승리했다. 유가족의 고통을 십분 이용한 세력은 바로 현 정권이다. 이용한 정도가 아니라 무시하고 모욕했다.

유가족이 양보해야?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가족의 죽음. 그 이후의 삶, 우주, 모든 것을 상실한 사람들이 누구에게 무엇을 더 양보해야 하는가. 그들에게 무엇을 더 ‘받아내야’ 저잣거리 표현으로, 속이 후련하겠는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양보하는 것이 균형인가. ‘우리’는, 사회는, 국가는 그들에게 무엇을 양보했는가.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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