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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논단>

임지현 (한양대교수.역사학)

2009-03-27


1996년이니 이미 10년도 지난 옛일이다. 폴란드에 삶의 둥지를 틀고 있던 나는 그해 가을 벨라루스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로드노 대학에서 강연을 마치고, 차로 두세 시간 거리의 노보그로덱에 있는 폴란드의 대문호 아담 미츠키에비츠의 생가를 둘러보고 오는 길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이 마침 '고기 없는 날'이라 모든 식당이 문을 닫아 배를 쫄쫄 굶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당시만 해도 폴란드에서는 이미 사라진 현실 사회주의의 결핍의 유제를 벨라루스에서 경험했던 것이다.

그러나 배고픔보다 더 생생한 기억은 슬라브 벽돌로 조잡하게 갓 지은 집들이 길가에 줄줄이 늘어선 새로운 정착촌들이었다. 동행한 그로드노 대학의 친구에게 물으니, 체르노빌의 원자력 발전소 폭발 때문에 방사능으로 오염된 지역의 주민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만든 새로운 정착촌이란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인해 장애아로 태어난 어린이들 (경향신문 DB)


체르노빌이 위치한 우크라이나의 대부분 지역은 정작 멀쩡했지만, 이웃한 벨라루스는 바람의 방향 때문에 전 국토의 3분의 1가량이 방사능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주민들을 소개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소비에트 연방 시절이라,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간에 심각한 갈등이나 충돌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체르노빌의 예에서 보듯이, 군소 국가들이 조밀하게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유럽의 경우 자신의 '고유한' 영토 내에 자기 돈으로 부족한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핵발전소를 짓는 것은 더 이상 개별 국민국가가 행사하는 주권의 문제가 아니라 동유럽 전체의 사활이 걸린 '초국가적' 문제인 것이다.

방사능 낙진이나 그것을 몰고 오는 바람은 불경스럽게도 '국경'에 대한 개념이 없다. 체코에서 핵 발전소를 짓는데, 엄격한 환경 평가와 기술 평가를 거쳐 이웃 폴란드나 슬로바키아, 헝가리 의회의 승인을 필요로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제멋대로 국경을 넘나드는 방사능 낙진은 더 이상 개별 국민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환경적 '위험'과 '위기'의 관리주체일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점점 더 빈번하게 한반도의 봄을 공습하는 황사 역시 '국경' 개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서슬 퍼런 출입국 관리소조차 불법입국으로 황사를 체포할 수는 없다. 혹은 체포하더라도 별 수 없다.

몽골의 사막지대와 황하 유역의 황토지대에서 발생한 황사는 제트기류를 타고 미국의 덴버 시에까지 도달할 정도로 위력적이다. 심지어 황사의 중금속 미세 먼지가 서울 시민들의 평균 수명을 2~3년 줄인다는 연구보고서까지 나올 정도이다. 문제는 자신들의 삶에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치는 황사에 대해 정작 한반도 주민들은 속수무책이라는 점이다.

마구잡이로 나무를 베서 사막화를 촉진하든, 근대화를 앞세워 오염물질을 마구 배출하든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민국가의 경계 내에서 일어나는 한 그것은 중국의 주권 문제이므로 우리는 개입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이다. 주권의 신성불가침성과 민족주의의 주술에 사로잡혀 있는 한,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사회적 상상력은 빈곤할 수밖에 없다.

수년 전 중국이 황해 연안에 대규모 핵발전소 건설안을 발표했을 때, 황사와 함께 제멋대로 국경을 넘나드는 방사능 낙진을 고민하기보다 한국의 발전 설비를 팔아 국민경제에 기여할 수 있다는 한국 사회 주류의 반응은 국경에 갇혀 있는 이 빈곤한 상상력이 얼마나 자기 파괴적일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물론 한국의 산림청이 중국당국과 공동으로 사막화를 막는 방풍림을 조성한다든지 일부 환경 친화적 대기업이 황사를 근원적으로 막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다. 더 근원적으로는 '국경'에 갇혀있는 우리의 상상력을 민족주의의 주술에서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

국경을 넘어서는 트랜스내셔널한 상상력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적 삶의 절실한 요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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