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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순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날치기. 엊그제 여당의 내년도 예산안과 부수법안 단독처리 행태를 이렇게 부른다. 갑자기 날치기란 말의 정확한 뜻이 궁금해졌다.
검색해보니 “남의 물건을 잽싸게 채어 달아나는 짓” “남의 물건을 잽싸게 채어 달아나는 도둑” “법안을 가결할 수 있는 의원 정족수 이상을 확보한 당에서 법안을 자기들끼리 일방적으로 통과시키는 일”이라고 나와 있다.

세 번째 용례가 사전에 버젓이 올라와 있다는 게 부끄러우면서도 날치기가 애초에 ‘남의 물건’을 채어가는 짓이란 게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날치기는 비단 국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난 7일에 있었던 국가에너지·전력수급·천연가스수급 기본계획 등 3가지 에너지 관련 기본계획 시안에 대한 공청회도 일종의 ‘날치기 공청회’라 할 수 있다. 계획 하나를 다루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3시간에 무려 3개의 계획을 한꺼번에 처리했다.

정부는 에너지 관련 계획 간 기본 전제치, 수요 전망, 에너지 목표안을 공유하면서 정합성을 높이기 위해 공동으로 공청회를 진행한다고 했지만 그러자면 시간도 인원도 늘려서 진행해야 했다. 공청회는 무릇 의견을 ‘듣는’ 자리임에도 패널 토론과 방청석 질의에 세 시간 중 단 한 시간만 할애했고 시민단체 관계자는 단 한 사람만 초대했다. 누구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으며 그 의견을 반영할 의지가 있기나 했던 걸까.

내용도 문제다. 5년에 한 번씩 수립하는 국가에너지기본계획을 2008년 수립 이후 2년 만에 다시 만들고는 2030년 에너지 수요를 1차 계획에 비해 무려 13.4%나 늘려 잡았다. 에너지 수요 전망 산출에 쓰인 4가지 전망치(GDP 성장률, 인구 증가율, 산업구조, 유가) 모두 1차 계획 때보다 오히려 에너지 소비를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변화되는데, 에너지 소비는 오히려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의도적으로 수요를 늘려 잡아서 온실기체 감축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보이려는 게 아니라면 이런 셈법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하기 어렵다.


언제부턴가 친환경 에너지원으로 분류되고 있는 발전소를 4차 전력수급기본계획보다 2기 많은 14기를 건설한다고 한다. 20기가 가동 중인 현재에도 세계 10대 원전 대국 중 발전소가 가장 조밀하게 입지한 상태인데, 사용후 연료 처분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전쟁이나 테러 위험이 있는 분단국가에서 이런 위험시설을 이렇게 조밀하게 지어도 되는 걸까?

사회적 논란이 한창인 대규모 조력발전소 건설을 신재생에너지 확대계획에 반영했고,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송전탑과 송전선도 계속 확장할 계획이다. 늘리고 키우는 성장만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유일한 가치인 양.
‘녹색’이란 말이 어느 곳 하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지금 우리 사회는 참으로 살풍경하다.
독일 녹색당이 표방하면서 널리 쓰이게 된 ‘녹색’은 본디 생태주의와 환경보전에 대한 관심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책임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풀뿌리 민주주의, 국가와 개인이 가하는 구조적 폭력과 억압을 넘어 자결을 강조하는 비폭력 등을 모두 포괄하는 이념이다.


하지만 오늘 여기서 지겹도록 듣는 ‘녹색’은 오히려 그 반대다. ‘진녹’(진짜 녹색)이란 말을 따로 만들어야 할 정도로 오염되고 전도되어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무관심과 무기력을 넘어서는 것, 눈과 귀로 보고 들은 사건과 이름들을 기억하고 표로 말하는 것, 그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지금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본을 다시 돌아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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