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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는 조그만 자루를 가지고 와서 도토리 한 무더기를 탁자 위에 쏟아놓았다. 그는 도토리 하나 하나를 아주 주의 깊게 살펴보더니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따로 골라놓았다. 그는 아주 굵은 도토리 한 무더기를 모으더니 그것들을 열 개씩 세어 나누었다. 그러면서 그는 도토리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고 그 중에서도 작은 것이나 금이 간 것들을 다시 골라냈다. 그렇게 해서 완벽한 상태의 도토리가 100개 모아졌을 때 그는 일을 멈추었고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프랑스 자연주의 작가 장 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의 첫 장면이다. 스무 해 전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읽은 이래 이 첫 장면은 내 머리에 깊이 각인되어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나를 깊은 명상의 상태로 빠져들게 한다. 단지 기억과 인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와 똑같은 일을 해마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일 년 먹을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씨고르기를 하고 있지만 그는 30여년 동안 자기 땅도 아닌 황무지에 해마다 씨를 심어 거대한 숲을 만들어냈다. 그 인격의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길 없기에 나는 씨를 고를 때마다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어느 해인가 한 일본인 교수가 인터뷰 도중 내게 뜬금없이 물었다. “당신도 기도를 합니까?” 다른 주제로 인터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잖이 당황했다. “네 합니다. 삶의 매 순간마다 모든 생명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기도합니다.” 진심이기는 했지만 거의 립서비스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한때 교리서에 의존해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시간과 장소를 정해 기도를 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구체적인 현장과 따로 논다는 느낌이 들면서 기도와 행위가 일치되는 방식을 찾기 시작했다. 큰일을 치르기 전 마음을 모아 기도도 드려보고 숨가쁜 순간에 화살기도도 바쳐보았지만 모두 내가 ‘기도를 했다’는 자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러다 산속에 들어와 자연과 함께 일을 하면서 모든 게 저절로 해소되었다. 여기에선 기도가 일이고 일이 기도가 되었다. 굳이 기도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아도 열심히 일을 하다보면 그 자체로 충만함과 신성함에 가슴이 뿌듯했다. 농장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 가운데 기도의 신성함을 가장 실감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씨 고르기’다. 한 해 동안 정성들여 키워 수확한 씨들을 테이블 가득 펼쳐놓고 다음 생명을 이어갈 후계자를 선택하는 작업은 결코 허투루 할 일이 아니다. 동료들 가운데 가장 크고 빛나며 단단한 놈을 골라야 한다. 그 하나 하나가 이루어낼 생명의 기적을 상상하면서 씨앗의 상태를 면밀히 살펴보는 순간은 긴장과 기대와 엄숙함이 교차하는 시간 없는 시간이다. 마치 진공상태와 같은 이 시간을 전후로 거대하고 복잡한 생명의 확산과 순환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_AP연합뉴스
사람들이 기도를 종교의 전유물 정도로 생각하니 일단 종교와 관련하여 살펴보자. 종교에 사람을 묶어두는 가장 강력한 기제는 ‘의식(儀式)’과 ‘기도’다. 의식과 기도는 어제까지 허랑방탕하게 살던 사람도 단박에 종교의 신성함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마치 마법에 걸린 듯 기도문을 외우자마자 신성한 존재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일부 교파에서는 이 느낌을 가지고 구원을 받았네 어쨌네 하며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지만 아무튼 이 느낌이 살아있는 한 종교는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이 느낌은 ‘무임승차’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신앙의 선조들이 각고의 노력과 희생을 통해 이루어놓은 신성한 영역(sacred field)에 뒤에 온 사람들이 단지 의식에 참여하고 기도하는 것만으로 쉽게 들어서는 것이다. 무임승차는 종교를 대중화하고 교세를 넓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거꾸로 교인의 신심을 껍데기로 만들고 교인을 맹목적인 추종자로 만드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무임승차자의 가장 큰 특징은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공짜로 이득을 취했기 때문에 잃을 것이 없다. 고맙게도 종교공동체는 충성만 바치면 이러한 무임승차자들에게 무엇이든 공짜로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 대신 종교는 이들의 충성심을 이용해 거대한 권력기관으로 변한다. 현대에 들어 종교가 세력을 잃게 된 건 무임승차로 얻은 신성함이 공허하다는 것을 깨우치면서이다. 그 자리를 과학기술과 다양한 현대의 엔터테인먼트가 치고 들어오면서 종교는 더 이상 신성함을 거래할 수 없게 되었다.
물질주의가 극한에 다다른 지금 인류의 문명에는 신성의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무임승차가 아닌 자력으로 신성함에 이르는 길이 있을까? 먼저 신성의 근원을 확인하고 그에 가까이 가는 것이 가장 간명한 방법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성의 근원을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초월적인 것으로 생각하거나, 그런 초월적인 힘이 축적되어 있다고 믿는 특정한 장소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래가지고는 기존의 실패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일단은 눈에 보이는 천지자연을 1차적인 신성의 근원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 위에 인간이 세운 사회와 역사는 어디까지나 2차적인 것이다. 문제는 지금의 고등종교 대부분이 2차적 신성 영역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간지(奸智)가 작용할 여기가 많다. 그동안 종교가 저지른 숱한 오류의 역사는 이 간지의 작용이며 대중은 그 희생양이었다. 인간의 간지를 근원적으로 차단하고 신성에 접촉하는 길은 일차적 신성에 직접 다가서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신성의 근원인 천지자연에 다가서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은 노동을 통해 접근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사실 내 몸의 생존기반인 대지를 배경으로 벌이는 육체노동은 인류의 출현 이래 지금까지 신성에 이르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직접적인 길이었다. 비단 종교에서뿐 아니라 현대사회가 총체적 생태위기 속에서 문명의 지속가능성 여부를 묻게 된 것도 일차적 신성을 무시해왔기 때문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의 단순한 노동이야말로 가장 심오하고도 신성한 기도이다.
황대권 | 생명평화마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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