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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머머.” 박순희 선생(전 섬유노조 원풍모방지부 부지부장)이 사진 한 장을 내밀자 황선금 선생(원풍동지회 회장)이 놀란다. 책갈피에서 발견했다는데, ‘직단 뜬올 바디 착오 방지’라는 표어를 새긴 직조기 앞에 ‘1975년 스물여덟 살 박순희’가 서 있다. 다림질한 작업복, 풀 먹인 옷깃, 부드러운 미소가 당당하다. 기계 네 대를 다룬 기술자였다. 40년이 지났건만 흑백 사진이 하나도 낡지 않았다. 두 선생에게도 민주노조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또렷하다.
이들이 마주 앉은 곳은 32년 된 원풍 노동자의 집이다. 영등포역에서 신길동 쪽으로 가다보면 나오는데, 1982년 정권이 폭력으로 강제 해산시키고 해고한 원풍노조 여성 노동자들이 1984년에 마련했다. 200여 조합원을 모이게 하고 곳곳에서 활동하게 한 터전이다. 해고에 더해 블랙리스트, 구속, 사찰로 고통받으면서도 어디선가 다시 노조를 만들고 노동자의 권리를 찾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직포·정사·정방·가공·염색·검사 부서별 모임, 기숙사 또래 모임이 그대로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든 삶이든 ‘나눔 교육’을 통해 발 딛고 선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원풍집’ ‘신길동 101호’라 불린 이 집은 원풍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열려 있었다. 1980년대 노동·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이 여기서 노동자 교육·상담·조직에 나섰고, 영등포와 구로 지역 노동자들이 찾아와 소모임을 통해 세상을 깨쳤다. 먼 지역 노동자가 서울에 오면 묵어갔다.
1990년대 말, 상급 노조와 노동단체가 여럿 생긴 뒤에는 한창 자라는 아이들과 함께 (사)녹색환경운동을 만들었다. 20·30대가 된 자녀들이 ‘꿈을 이어가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이 공간에서 만난다.
박순희씨(가운데)가 19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출판기념식에서 노동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과 노래를 부르고 있다._경향DB
“노동조합 활동으로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가치관이 형성되었는데 이 기억이 삶속에서도 연장되는 거죠. 아이들 교육이나 지역에서 활동도 그렇고, 통반장을 하더라도 그런 생각으로 활동해요. 노동조합이 인생 교육장이었다고들 말해요. 지금도 우리 사회는 몸으로 하는 노동을 천시하잖아요. 1970년대는 그야말로 노동자를 얕잡아보는 시대였는데, 우리는 ‘나는 노동자야’라는 자기 정체성을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서 찾았죠.”(황선금)
노동자가 자기 정체성을 찾는다는 건 인간 존엄을 찾겠다는 것. 원풍에서 시간을 한참 지나온 2005년, 기륭전자 노동자들을 통해 비정규직·불법파견 노동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노조를 만들었을 뿐인데 원풍에서처럼 해고, 구속, 사찰, 구사대와 공권력의 폭력이 이어졌다. 꼬박 10년이다. 신문 1면을 차지한 사회적 합의를 회사는 끝내 무시했다. 한국 사회가 딱 그만큼의 수준임을 말해준다.
그런데 기륭 노동자들은 움츠리지 않는다. 그이들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로 오랜 농성을 했던 이들과 함께 비정규직 없는 세상,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며 ‘비정규 노동자의 집’을 만들겠다고 한다. 상경·노숙 투쟁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쉼터로, 교육과 문화 공간으로 꾸리겠다며 주춧돌을 함께 놓자고 한다. 노동운동은 ‘인간화 운동’이라고 늘 강조하는 박순희 선생도 이 집의 제안자다.
“인간의 존엄성은 누구나 다 똑같아요. 차별을 없애야죠. 원풍에서는 끊임없이 그 차별을 없애는 싸움을 했어요. 사무직과 현장의 작업복 색깔이 다른 것도, 식당에서 따로 줄을 서는 것도 싸워서 똑같이 만들었죠. 반장과 조장을 관리자가 뽑는 게 아니라 입사 순서로 돌아가게 하고, 회사에서 상을 주려는 것도 차별이 될 수 있기에 거부했어요. 앞으로 만들 비정규 노동자의 집이 노동자가 교류하고 연대하고 조직하며 서로에게 산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면 좋겠어요. 서로 눈을 맞추면서 살아 움직이는 곳 말이죠. 노동운동의 기본은 인간답게 사는 운동이잖아요.”(박순희)
꿈은 어디서 오는 게 아니라 여기서 꾸는 것이라고, 무엇이 많아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기에 시작할 수 있는 거라고, 고난 속에서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일을 포기하지 않은 원풍과 기륭 여성 노동자들이 알려준다. 차별 없는 세상, 차별 없는 노동 현장에서 찰칵, 사진을!
박수정 |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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