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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스캔들이 돼버렸다. 이런 식의 인물 중심의 스캔들은 분노를 일으키기엔 아주 호재이지만, 분노를 몇몇 인물들로 좁혀버리는 것은 그 자체로서 가장 효율적인 위기관리 통치방식이다. 이를 두고 미하일 바흐친은 ‘카니발리즘’이라고 말했다.

공포와 웃음의 극한에서 표출되는 용기와 그 허무함 말이다. 바흐친에 따르면 근대의 숭고미와는 다른 어떤 미적 상태, 즉 1960년대 시작된 박정희 체제와 1979년에 죽은 박정희의 망령을 다시 살려내서 ‘부관참시’해야 하는 이 현실이 어쩌면 카니발리즘이 아닐까?

그래서 한편으로 속 시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그동안 과연 무엇을 했길래, 1987년 민주화 이행 이후 민주주의는 무엇을 했길래 이렇게 됐을까? 아니 과연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여기서 자유로운가? 이런 질문이 시종일관 떠나지 않는다. 박근혜와 그 너머 박정희 ‘체제’의 문제로 돌린다면, 과연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체제의 문제는 해소될까? 현재의 사회적 불평등, 민주주의의 결핍, 이념적 협애함은 과연 박정희 체제에만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지난 30년의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아니 민주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박씨 ‘왕조’에 대한 분노의 정념으로 촛불을 한정하려는 프레임은 그래서 어떤 축제의 카니발 같기도 하다.

사실 카니발리즘의 대표적인 예는 서유럽 시민혁명들과 그 혁명들 사이에서 끝없이 터져나온 농민봉기들이다. 마을의 광장에서 벌어졌던 기득권층에 대한 폭로와 단두대 놀이 같은 카니발들. 그것은 근대 민주주의 혁명의 대표주자인 프랑스혁명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사회를 온통 뒤흔든 혁명의 도화선이었던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그곳을 습격했을 때 거기에는 달랑 1명의 여자 죄수와 6명의 도둑, 사기꾼 등 잡범들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과연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기나 한 것일까? 아니 왜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그 많은 대중 소요와 봉기들 중에서 이렇게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됐을까? 여러 역사사회학자들이 이런 질문을 제기할 만했다.

여하튼 시민혁명을 일으킨 신흥 부르주아지 혁명가들은 루이 16세의 왕비이자 외국인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와 교만을 그의 여성성과 묘하게 섞어가며 어마어마한 적대의식을 대중적으로 배양했다.

그 도움 덕인지 혁명은 성공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수치와 모욕, 그리고 대중의 성적인 조롱의 대상이 되어 단두대에서 머리가 잘려 죽임을 당했다. 대중은 열광했다. 그 당시에는 적어도, 자신들의 손으로 왕과 왕비를 단두대에 보냈으니.

하지만 프랑스혁명이 쟁취해낸 것은 미미했고, 심지어 지키지도 못했다. 사실 1789년 혁명은 끝이 아니었다. 단지 기나긴 혁명과 반혁명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아니 그 뒤의 과정 때문에 1789년은 ‘혁명’이라 불릴 수 있었다. 그 뒤로 프랑스는 100년의 혁명 과정을 겪어야 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1832년 봉기를 포함해서 말이다.

시사점은? 첫째, 불철저한 단기 혁명의 대가는 긴 시기의 정치적 과정을 통해서 지불해야 하며, 특히 민중의 희생과 피를 부르기도 한다. 둘째,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시 등장할 수 있다. 아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니라 반혁명의 피바람을 몰고 올 루이 보나파르트가 등장할 수 있다. 프랑스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없앴지만, 그보다 훨씬 더 독한 왕정복고주의자 루이 보나파르트의 반혁명을 겪어야 했다. 셋째, 프랑스혁명이 내세운 자유, 평등, 박애의 민주주의는 러시아 사회주의혁명과 반파시즘 인민전선 투쟁 이후인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100년 뒤에야 정립됐다. 넷째, 그럼에도 그 자유, 평등, 박애의 삼색기에서 배제된 식민지 민중들, 이민자들, 내부의 좌파에 대한 이념청소가 대대적으로 실시됐다. “우리는 유럽의 구석구석에 불을 질러야만 했다.”(조르주 뒤보, <1848년 프랑스 2월혁명>)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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