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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택시를 타면 기사와 수다를 떠는 경우가 많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야 워낙 수다라서, 누구와도…. 나와 대화한 택시기사들은 대부분 순수한 사람들이지만 정치적으로는 극우파에 가깝다.
그거야 워낙 익숙한 일이니까, 투표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일상에서 그런 사람들하고 싸울 일도 없고, 재밌게 들어주려고 하는 편이다. 실제, 재밌다. 우리나라의 민중단체나 시민단체의 지도자 중에서 택시기사들이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아마도 환경재단의 최열 대표가 아닐까 싶다.
그분들이 최열에게 붙여주는 사회적 호칭은 ‘새끼’이다. 한때 환경운동연합이 환경 모니터링 요원으로 택시기사들과 캠페인을 오래해서 그렇기도 하고, 보수 신문이 ‘대표 빨갱이’로 딱지를 턱하니 붙여주어서 그렇기도 한 것 같다. 박원순은 변호사라서 그런지 좀 두려워하는 눈치일 때가 많고, 노회찬에 대해서는 아무 느낌 없는 것 같다.
90년대라는 공간에서 한국의 민중단체는 그때 막 합법의 장으로 나오기 시작한 노조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전개했고, 같은 시기에 자신의 모습을 형성시킨 시민단체는 노조가 아닌 곳, 그곳이 주 활동 무대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말만 그렇다.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80년대에는 노동운동하던 사람들이 90년대에는 시민운동으로 옷을 갈아입은 게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 혹은 2000년대에 새롭게 시민운동에 합류한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사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왕년에 자본론 한 번 안 사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그런 게 현실이다.
이렇게 사람이 얽혀 있다 보니 민중단체는 시민단체에 적지 않은 견제를 했고, 시민단체도 초창기에는 “노조에 먹히면 안된다”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민중단체를 견제했다. ‘부르주아 운동’, ‘프티 운동’ 등 지금 들으면 유치찬란한 원색적 표현을 서로 써가면서 아픈 구석을 콕콕 찔러댔다.
‘귀족 노조’ 등 사실 한국적 맥락에서는 잘 맞지도 않는 표현을 쓰거나 “너는 노빠야”, 이렇게 긴장관계를 넘어서 진짜 서로 아프게 했었다. 그게 90년대, 시민운동 1세대들의 모습이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막 시작한 새로운 운동이 자리 잡는 과정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 같다. 2000년대 중후반이 되면서 이런 긴장이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민중운동, 그런 걸 경험해보지 않은, 그런 게 있는지도 잘 모르는 전혀 새로운 청년들이 시민운동의 실무자가 되었다. 시간이 가니까 당연한 일이다. 의식적으로 민중단체를 견제해야 할 필요도, 이유도 느끼지 못하는 신입 간사들은 도대체 자기네 지도자들이 왜 민중단체와 굳이 금을 긋는지, 어색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등장한 것 같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최초로 원내 진출을 하면서 생겨난 어색함이 그런 긴장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다. 1세대들은 노조가 먼저 정치세력화하면서 원내에 진출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고, 민중단체 지도자들은 “이제 시민단체들도 우리한테 와서 줄 서라”, 그런 약간은 고압적 자세를 연출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시민단체는 ‘현실적 이유’라며 민주당 쪽으로 더 가려고 했고, 민중단체들은 “그러니까 너희들이 노빠인 거야”, 요렇게 ‘드립’들을 날려주셨다. 민중단체와 시민단체 사이에 긴장감은 필연적일 수 있지만, 실제 선거지평 내에서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좀 심하다 싶게 ‘갈굼질’들을 했었다.
국면만 보면, 운영위원급들은 당시의 민주노동당에 견제가 급했고, 실무진은 아주 호의적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정책 대안이나 자료를 민주당에 먼저 줄 거냐 아니면 민주노동당에 먼저 줄 거냐, 그런 걸 선택했어야 했다.
‘시민 없는 시민단체’라는 불만이 막 터져나온 게 그 시점이기도 하다. 이 긴장관계는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한명숙을 밀 거냐, 노회찬을 밀 거냐, 아니면 단일화를 밀 거냐로 단체 사이에서, 단체 내부에서 싸늘하게 입장이 갈렸다. 당시 나는 노회찬 쪽 후원회장을 맡게 되었는데, 아마 선거 막판과 직후에 평생 얻어먹은 욕보다 더 많은 욕을 얻어먹은 것 같다.
당시 민중단체는 노회찬을 밀었고 시민단체는 한명숙을 밀었다. 정책대안 혹은 정책능력 그런 건 페이퍼에만 있는 말이고, 90년대 중반부터 오래된 긴장관계가 선거라는 단일 국면에서 터져나온 셈이다. 2012년 대선을 놓고 두 진영이 협력할 것인가 아니면 각자의 길을 갈 것인가.
요게 지금 초미의 관심사 아니겠는가? 현실적 힘은 시간 속에서 시민단체 쪽으로 간 건 맞는데, 민중단체의 지원과 협력 없이 독자적으로 승리할 가능성은 없다. 2%, 안 필요해? 카드는 민중단체가 쥔 셈인데, 아쉽게도 요게 좀 ‘뻥카’에 가깝다.
지방선거와 달리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민중단체 쪽 활동가들도 막상 자기 쪽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판때기’는 펼쳐졌는데, 선수는 없고 감독만 잔뜩 있는 상황. 그러니 차라리 조국이 나가라,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조국 교수는 양쪽 진영에 모두 속한 사람이다.
그거야 워낙 익숙한 일이니까, 투표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일상에서 그런 사람들하고 싸울 일도 없고, 재밌게 들어주려고 하는 편이다. 실제, 재밌다. 우리나라의 민중단체나 시민단체의 지도자 중에서 택시기사들이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아마도 환경재단의 최열 대표가 아닐까 싶다.
그분들이 최열에게 붙여주는 사회적 호칭은 ‘새끼’이다. 한때 환경운동연합이 환경 모니터링 요원으로 택시기사들과 캠페인을 오래해서 그렇기도 하고, 보수 신문이 ‘대표 빨갱이’로 딱지를 턱하니 붙여주어서 그렇기도 한 것 같다. 박원순은 변호사라서 그런지 좀 두려워하는 눈치일 때가 많고, 노회찬에 대해서는 아무 느낌 없는 것 같다.
90년대라는 공간에서 한국의 민중단체는 그때 막 합법의 장으로 나오기 시작한 노조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전개했고, 같은 시기에 자신의 모습을 형성시킨 시민단체는 노조가 아닌 곳, 그곳이 주 활동 무대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말만 그렇다.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80년대에는 노동운동하던 사람들이 90년대에는 시민운동으로 옷을 갈아입은 게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 혹은 2000년대에 새롭게 시민운동에 합류한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사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왕년에 자본론 한 번 안 사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그런 게 현실이다.
이렇게 사람이 얽혀 있다 보니 민중단체는 시민단체에 적지 않은 견제를 했고, 시민단체도 초창기에는 “노조에 먹히면 안된다”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민중단체를 견제했다. ‘부르주아 운동’, ‘프티 운동’ 등 지금 들으면 유치찬란한 원색적 표현을 서로 써가면서 아픈 구석을 콕콕 찔러댔다.
‘귀족 노조’ 등 사실 한국적 맥락에서는 잘 맞지도 않는 표현을 쓰거나 “너는 노빠야”, 이렇게 긴장관계를 넘어서 진짜 서로 아프게 했었다. 그게 90년대, 시민운동 1세대들의 모습이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막 시작한 새로운 운동이 자리 잡는 과정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 같다. 2000년대 중후반이 되면서 이런 긴장이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민중운동, 그런 걸 경험해보지 않은, 그런 게 있는지도 잘 모르는 전혀 새로운 청년들이 시민운동의 실무자가 되었다. 시간이 가니까 당연한 일이다. 의식적으로 민중단체를 견제해야 할 필요도, 이유도 느끼지 못하는 신입 간사들은 도대체 자기네 지도자들이 왜 민중단체와 굳이 금을 긋는지, 어색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등장한 것 같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최초로 원내 진출을 하면서 생겨난 어색함이 그런 긴장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다. 1세대들은 노조가 먼저 정치세력화하면서 원내에 진출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고, 민중단체 지도자들은 “이제 시민단체들도 우리한테 와서 줄 서라”, 그런 약간은 고압적 자세를 연출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시민단체는 ‘현실적 이유’라며 민주당 쪽으로 더 가려고 했고, 민중단체들은 “그러니까 너희들이 노빠인 거야”, 요렇게 ‘드립’들을 날려주셨다. 민중단체와 시민단체 사이에 긴장감은 필연적일 수 있지만, 실제 선거지평 내에서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좀 심하다 싶게 ‘갈굼질’들을 했었다.
국면만 보면, 운영위원급들은 당시의 민주노동당에 견제가 급했고, 실무진은 아주 호의적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정책 대안이나 자료를 민주당에 먼저 줄 거냐 아니면 민주노동당에 먼저 줄 거냐, 그런 걸 선택했어야 했다.
‘시민 없는 시민단체’라는 불만이 막 터져나온 게 그 시점이기도 하다. 이 긴장관계는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한명숙을 밀 거냐, 노회찬을 밀 거냐, 아니면 단일화를 밀 거냐로 단체 사이에서, 단체 내부에서 싸늘하게 입장이 갈렸다. 당시 나는 노회찬 쪽 후원회장을 맡게 되었는데, 아마 선거 막판과 직후에 평생 얻어먹은 욕보다 더 많은 욕을 얻어먹은 것 같다.
당시 민중단체는 노회찬을 밀었고 시민단체는 한명숙을 밀었다. 정책대안 혹은 정책능력 그런 건 페이퍼에만 있는 말이고, 90년대 중반부터 오래된 긴장관계가 선거라는 단일 국면에서 터져나온 셈이다. 2012년 대선을 놓고 두 진영이 협력할 것인가 아니면 각자의 길을 갈 것인가.
요게 지금 초미의 관심사 아니겠는가? 현실적 힘은 시간 속에서 시민단체 쪽으로 간 건 맞는데, 민중단체의 지원과 협력 없이 독자적으로 승리할 가능성은 없다. 2%, 안 필요해? 카드는 민중단체가 쥔 셈인데, 아쉽게도 요게 좀 ‘뻥카’에 가깝다.
지방선거와 달리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민중단체 쪽 활동가들도 막상 자기 쪽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판때기’는 펼쳐졌는데, 선수는 없고 감독만 잔뜩 있는 상황. 그러니 차라리 조국이 나가라,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조국 교수는 양쪽 진영에 모두 속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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