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도법 스님이 세간에 알려진 것은 1998년도 조계종 법난 때 사태 수습을 총지휘하면서부터이다.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니까 ‘생명파’라는 야유를 듣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불교계 내의 운동권을 민중파와 생명파로 크게 나누는데, 민중파는 다들 알다시피 불교를 통한 빈민 운동에 앞장선 그룹이고, 생명파 혹은 생명평화파는 삼보일배와 4대강 반대운동 등 환경운동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그룹이다. 도법, 수경 이런 분들이 생명파를 이끌어왔다. 깡패들, 이판승, 정치승, 이런 손가락질 받는 ‘땡중’들만 있는 게 아니라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을 폭넓게 이끄는 스님들도 계시다.

이런 도법 스님에게 어느 날 세무서에서 전화가 왔다. 별 소득은 없지만, 어쨌든 대표를 맡고 있는 회사가 아주 많으니까 세무서 입장으로 보면 재벌쯤 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고만고만했던 단체들이지만 지리산의 실상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작은 조직들이 인드라망, 불교생협, 지리산 생명평화연대 등 도법 스님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규모는 작아도 총수 중심의 재벌식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세무서에서 보기에 도대체 이게 뭐하는 곳들인지,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일종의 진법인데, 작은 단체들이 혼자 있으면 아무 힘도 없기 때문에 연대를 하게 되기도 하지만, 20대 때 도법 스님과 같이 활동하던 실무 활동가들이 30~40대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조직이 분화된 것이기도 하다. 규모는 작아도 재벌처럼 움직인다는 얘기를 했더니 도법 스님이 크게 웃으셨다. 돈 좀 있었으면 좋겠고, 활동가들 나이 먹어서 너무 쪼들리고 사는 게 마음이 아프시다는….



시민운동의 분화는 한편으로는 전문 영역이 늘어나는 것도 한 이유이지만,
90년대 20대였던 활동가들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언제까지나 실무 활동가만 할 수는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독립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과정이 인드라망 그룹처럼 부드럽고 마찰 없이 진행된 것만은 아니다.

창립그룹에 해당하는 왕당파들이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되었고, 노무현 정권 초기 이 왕당파들과 평간사 혹은 주부 활동가 사이의 마찰이 극도로 팽팽해지게 된다.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이렇게 눈에 띄는 곳에서도 조직 내부의 문제가 심각해지게 되었지만, 한살림같이 그런 내부 문제가 없을 것 같은 곳에서도 조직 문제는 심각했다. “생협에서도 조직 문제가 있어” 이럴 듯 싶지만, 생협이야말로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왕당파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50대 남성 엘리트들이 한국에서 생활협동조합이라는 운동을 처음 띄운 주력 그룹이다. 실무 활동가들인 상근자들은 아마 한국 사회운동조직에서 가장 높은 임금을 받는 사람들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경향신문, 한겨레 기자보다 두 배 정도 많이 받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그들의 연봉을 알면 한살림 같은 곳에서 상근하고 싶다는 대학생들이 줄을 설 것이다. 삼성이나 현대 정도 가지 않을 거라면 한살림은 아주 좋은 선택이다. 환경운동연합보다는 세 배 정도 받는다. 중견 활동가들이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키우면서 현실적으로 생협 같은 곳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이렇게 설명이 된다.
그러나 생협에서 일하는 사람이 이런 상근 활동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이 생명운동하는 사람들 특히 주부들이 자원봉사 형식으로 아주 박봉을 받으면서 같이 일을 한다. 같이 가난할 때에는 문제가 없는데, 이제 좀 넉넉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 이건 언제든 조직 내의 시한폭탄처럼 된다.
같은 생협이지만 도법 스님이 이끄는 인드라망에서는 그런 문제가 잘 안 생기는 게, 여긴 워낙 공평하게 가난해서 그런 것 같다. 그 대신에 누가 주도권을 쥘 것인가, 그런 문제가 생겨난다.

환경운동연합의 위기는 왕당파의 문제는 아니고, 왕당파 그 이후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최열 사무총장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난 다음, 진짜 위기는 그 다음에 왔다. 왕이 빠진 자리에서 누가 왕을 할 것인가, 그 왕당파 내부의 갈등, 그게 2000년대 중반에 한국의 시민단체가 위기를 겪게 된 근본 이유로 볼 수 있다. 큰 단체든, 작은 단체든 그렇게 내부 문제로 끙끙 앓고 있는 동안에 열린우리당은 급격하게 쇠약해져 갔고, 시민운동을 모방한 뉴라이트의 등장으로 다음 정권이 밑바닥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시민운동의 힘을 한 축으로 집권한 노무현 계열은 자신들의 최대의 우군인 시민단체들이 어떤 문제로 위기를 겪고 있는지 낌새도 못 챘다. 왕당파의 위기, 그게 정권이 넘어간 진짜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 위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 우석훈의 ‘시민운동 몇 어찌’는 신라 향가 해석으로 유명한 양주동 박사의 ‘몇 어찌(幾何)’라는 수필에서 인용한 단어입니다.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