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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은 제정 러시아 말기에 차르를 지지하는 왕당파들이 상징으로 사용하였던 색깔이다. 왕이 과연 자본주의에 존재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해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많은 국가는 입헌군주제 형태로 왕조 자체를 유지하는 공화국 형태를 가지고 있다. 시민운동이 만난 가장 큰 조직의 위기는 왕당파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조직은 공무원을 빼면 대부분 왕과 왕당파가 존재한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한국의 대기업은 왕과 왕당파의 조직, 그게 조직론의 거의 전부다. 오너가 존재하고, 2세 심지어는 3세 승계까지 이루어지는 이 상황에서 왕당파가 되는 길만이 40대 조기 퇴직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아니겠는가?

한국의 민중단체에는 왕이 없다. 진보신당의 얼굴로 간주되는 노·심, 즉 노회찬과 심상정도 왕은 아니다. 왕 대신에 파벌이 있고, 계열이 있다. 민주노총에 한창 계열이 많을 때에는 30개도 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념과 사상이 그런 계열을 만들지만, 좀 지나다보면 친분과 작전 관계 같은 것으로 인하여 수도 없이 분화한다. 중앙파, 국민파, 여기에 한때 민주노동당에 있었던 일명 런던파까지. 꽤 긴 시간을 현장 운동하던 나도 알아듣지도 못할 만큼 많은 계열이 있었다. NL·PD, 요런 건 애교 수준이다.
왕은 없지만, 그 안에서 섭정관이 생겨난다. 왕도 없고 계열도 없는 진보신당과 달리, 민주노동당의 내부 조직은 섭정관 모델에 가깝다. 계열을 이끌어나가는 김창현 같은, 지금의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섭정관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은 강하지만 섭정관의 권력이 승계되지는 않는다. 이런 데에서는 경쟁이라기보다는 ‘옹립’이라고 하는 방식으로 리더를 선출한다. 지방선거 등 출마 후보도 옹립된다. 대중 검증은 내부 검증으로 생략된다. 80년대 대학교의 총학생회장이 이런 방식으로 선출되었고, 취임식을 실제로 ‘옹립식’이라고 불렀다.
옹립과 민주주의, 참으로 연결되지 않는 조합이지만 우리는 군사독재와 그런 식으로 싸웠다. 사실상 비밀조직인데, 리더를 그렇게 선출하지 않기도 쉽지 않았다.



시민단체가 생겨날 때, ‘명망가 방식’이라는 재야운동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런이런 사람들이 하니까, 믿고 같이 하십시다, 그런 게 시작이다. 그리고 현장에서 그런 과정을 총지휘한 사람들이 최열, 박원순으로 대표되는 바로 그 1세대들이다. 농구로 비교하면 일종의 플레잉 코치였던 셈인데, 실무도 하고 또 현장에서 직접 활동도 하였다.

당시의 20대 활동가 즉 김기식으로 대표되는 2세대와 1세대 사이에 사실상 권력의 위계 관계는 없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누가 누구를 시키는가, 그런 문제는 아니고, 의사결정 과정에는 사무총장급과 실무간사들이 같이 참여하였다. 기업식으로 말하자면, 회장님과 사원·대리가 같은 테이블에서 서로 농담 따먹기 하고, ‘쫑코’도 주면서 같이 토론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의 시민단체가 짧은 시간에 사회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조직적 특성이 있었던 것이다.
지도부가 있어서 여기서 뭔가 많은 것을 결정할 것 같지만, 운영위원회 같은 상위 조직에서는 전체의 방향만 정했다. 시민단체에서 평간사들은 한국의 어느 실무자들도 갖지 못한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다. 정부의 사무관들과 형식적으로는 유사하지만, 과장이나 국장은 사무관 평가와 함께 지휘권을 갖는다.
국장 눈치 안 보고 정책을 기안할 수 있는 사무관이 우리나라에 있는가? 그러나 시민단체에는 있었다. 민중단체에서도 그 정도의 권한을 실무자들이 가지지는 못했었다.

내용만으로만 보자면, 한국에서 평직원에게 절대권한을 준 것은 시민단체가 처음이다. 그게 2000년 초반까지의 시민단체 모습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는 법. 같은 사람이 사무총장을 오래하다 보니, 왕당파라는 게 생겨나게 되었다.
게다가 2003년 노무현 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민단체의 리더들에게는 정부와 교섭하거나 협의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생겨났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는 왕당파라는 게 고난만 있고 실익은 없는 것이었는데, 노무현과 함께 이제는 밀려 들어오는 평간사들에게 실무는 넘기고 편의와 혜택만 따먹을 수 있는 왕당파가 생겨나기 딱 좋은 조건이 되었다.
그나마 사무총장 등 명목적 지도부는 책임을 지지만, 어느덧 원로급으로, 아무도 선출되지 않은 이상한 옹립을 거친 ‘선배’, 이런 왕당파들과 함께 시민단체는 급격히 위기 국면으로 들어간다. 공기업 간사로 간 왕당파들, 잠시 운동을 했었다는 이유로 장관급 자리를 꿰찬 사람들, 아니면 고만고만한 자리 하나씩. 이들과 함께 왕당파는 더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나 운동은? 일단 망했다.

시민운동의 내부에 성공 요소가 있었던 것처럼 위기의 요소 역시 내부에 있었다는 게 내 진단이다.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없거나 시민 의식이 결여되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다음 주에 왕당파 얘기를 좀 더 해볼까 한다)

※ 우석훈의 ‘시민운동 몇 어찌’는 신라 향가 해석으로 유명한 양주동 박사의 ‘몇 어찌(幾何)’라는 수필에서 인용한 단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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