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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스웨덴) | 유희진기자 worldhj@kyunghyang.com


ㆍ스웨덴과 한국의 의료서비스 

⊙ 간암치료 스웨덴 박정식씨 “골수이식·간이식 두번 대수술에 43만원 냈어요”


스웨덴에 살고 있는 교민 박정식씨(63)는 2006년 간암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암 말기로 간 이식수술만 받으면 재발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골수 이식까지 받아야 한다”고 권했다. 그는 이후 투병생활을 통해 병마는 물론 시시때때로 엄습해오는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했다. 다행히 박씨는 두 차례의 대수술을 잘 견뎌냈다. ‘살았구나’ 하는 희망이 생겼다.


한국에 살고 있는 박진석씨(36)는 2004년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치사율이 높은 질병이어서 절망감이 엄습했다. 고된 항암치료 과정을 견디면서 그 역시 스웨덴의 박정식씨처럼 병마와 싸우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 맞섰다. 그러나 박씨에게는 한 가지 더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바로 돈 문제였다. 아내와 세 아이를 둔 가장으로 자신의 치료비에만 돈을 쏟아부을 수는 없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그는 냉정을 유지하며 자신의 치료비에 쓸 돈의 한계를 정해야 했다. ‘5000만원 이상을 치료비에 쓰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박씨에게 ‘살아야겠다’는 의미는 두 가지였다. 생명을 유지하는 일이 첫번째 의미였다면, 경제적으로 몰락하지 않고 생활을 유지하는 게 두번째 의미였다. 두 가지 터널을 무사히 통과했다고 느꼈을 때 박씨는 비로소 ‘살았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중병을 대하는 이 같은 다른 태도는 개인적인 성격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스웨덴과 한국의 서로 다른 의료제도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스웨덴에서 암 극복하기

지난 6월5일 스웨덴 스톡홀름시 박정식씨의 집. “스웨덴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며 인사를 건네는 박씨의 얼굴은 건강해 보였다.

“수술한 지 2년 정도 지나 위험한 시기는 넘겼어요. 예후가 아주 나쁜 건 아니지만 ‘좋다’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조심스러워요. 그래도 산책을 다닐 수 있을 정도가 됐으니 많이 좋아진 거죠.”

박씨는 2006년 ‘간에 큰 암 덩어리가 4개 정도 있다’는 ‘간암 말기’ 최종 판정을 받았다. 담당의사는 박씨에게 “암 덩어리가 너무 크고, 진행이 많이 돼 간 이식과 골수 이식 수술을 다 받아야 재발 위험이 없을 것 같다”면서 “두 가지 수술을 다 받는 것은 일반적인 치료법이 아니라 실험적인 케이스가 될 것”이라는 무겁고 절망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빨리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박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름 휴가철을 맞이한 스웨덴은 한가로운 풍경이었다. 의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많은 의사들이 휴가를 떠난 상태였고, 남아 있는 의사들도 기본적인 업무만 수행했다. 혼자서 ‘살 길’을 찾아 고군분투하다 보니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저는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 것 같아 속이 타는데 의사들은 여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못믿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랴부랴 한국에 있는 사람에게 연락을 했죠. 친구의 처남이 한국의 대형 병원에 있었거든요. 치료 받을 자리 좀 마련해달라고 했어요.”

보험도 없고, 모아둔 돈도 많지 않아 병원비 걱정이 되긴 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서울에 있는 병원에 보내기 위해 병원으로 가서 진료기록을 떼는 절차를 밟았다. 그를 진료하던 의사는 의아한 듯 박씨에게 물었다. “왜 이 병원 기록이 필요한 거죠?”

박씨는 “마음이 급한데 의사들은 휴가철이라고 여유를 부려서 병이 더 악화되기 전에 한국에 나가서 치료를 받을 계획”이라고 답했다. 박씨의 이야기를 들은 의사는 뜻밖에 박씨를 만류하기 시작했다. 의사는 먼저 “치료해야 할 환자 1순위에 올려놓을 테니 걱정말라”고 설득했다. 그래도 박씨가 망설이자 “한국에서 대수술을 받으려면 돈이 정말 많이 들 텐데 그러지 말라”며 재차 만류했다.

“저도 이왕이면 돈 걱정 안하고 이곳에서 치료를 받고 싶었죠. 일단 빨리 치료를 받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휴가철이 끝나는 8월 이후에 당장 수술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의사가 걱정말라면서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박씨는 수술을 받기 위한 몸 상태 점검에 들어갔다. 암이 간에서 다른 장기로 전이됐는지, 다른 장기 건강 상태가 큰 수술을 견딜 수 있는지에 대한 정밀검사를 받았다. 동시에 골수가 일치할 확률이 높은 형제가 박씨에게는 없었기 때문에 전 세계 기증자를 상대로 골수 이식자를 찾았다. 골수 이식을 하겠다고 등록한 6000만명 가운데 그와 골수가 맞는 사람이 독일에 있다는 연락이 왔다.



스웨덴의 감동 서비스

박씨는 2006년 12월 간 이식수술을 받고 다시 수술할 수 있는 몸 상태를 만든 후 2개월 지난 2007년 2월 골수 이식수술을 받았다. 그가 수술을 받고, 회복기를 거치는 동안 스웨덴 의료 시스템은 그에게 ‘감동 서비스’를 제공했다.

“의사들은 이보다 더 친절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세심하고 친절하게 제가 궁금한 것들에 대해 답해주고 치료를 해주었어요. 수술 날짜 결정도 일방적으로 하지 않았어요. 제 의견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죠. 궁금한 게 있으면 의사도 곧바로 만날 수 있고,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어요. 저는 스웨덴에서 산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 없었지만 언어가 서툰 사람들에게는 병원에서 통역 서비스까지 제공해줘요. 개개인 모두가 차별받지 않고 안정적인 상태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모든 배려를 다 해주는 거죠.”

병원에서 제공해준 정신상담사의 상담도 박씨에게 큰 도움이 됐다. 수술 결과가 성공적이었다고 해도 박씨는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옆 병동에서 아프다고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던 사람이 조용해지면 그 다음날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곤 했다.


“왜 이렇게 빨리 내 병이 안낫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면 그 상담사가 ‘너만 불안한 게 아니다’라면서 위로를 해줘요. 그리고 ‘너보다 훨씬 더 힘든 사람들도 많다’면서 다른 환자들의 이야기를 해주죠. 저는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털어놓아 시원하고, 상담사가 전해주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위안도 얻었어요.”


한국에서 백혈병 이겨내기

한국에 있는 박진석씨 역시 스웨덴의 박정식씨처럼 극적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겼지만 그 투병기는 사뭇 다르다. 지난 7월14일 서울 여의도의 ‘한국백혈병환우회’ 사무실에서 박진석씨를 만났다. 항암치료를 끝낸 지 채 5년이 되지 않았는데도 박씨에게서는 건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박씨는 2004년 11월 개인 건강검진에서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대기업에 다니다 아는 선배와 함께 컴퓨터 판매·서비스 사업을 시작한 후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던 때였다. 외환위기 후폭풍으로 사업이 쉽지 않았지만 ‘어려운 시기만 지나가면 괜찮아진다’는 믿음 때문에 월급 100만원도 안되는 돈으로 버틸 때였다. 너무 무리한 걸까. 결국 그의 몸은 그의 의지를 감당하지 못했다.


“제가 병 진단을 받았을 때 막내인 셋째가 생후 8개월이었어요. 저만 살겠다고 돈을 병원비로 다 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정보를 검색하고 알아보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백혈병 진단을 받자마자 사전 조사에 들어갔어요. 내가 받을 수 있는 국가 혜택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계산을 해 나갔죠. 주위에서 저보고 ‘독특하다’고 했어요. 당장 죽게 생겼는데 돈 계산 한다고.”

정보를 모으고, 자격이 되겠다고 판단한 후 충혈되어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동사무소에 찾아가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부터 했다. 미리 준비한 덕택에 1차 치료비부터 수급자 혜택을 보았다. 치료과정은 쉽지 않았다. 치료가 거듭될수록 힘겨웠고, 2차 치료가 끝났을 때는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 있었다. 급기야 3차 치료를 앞두고 박씨는 기로에 섰다. 비싼 병원비 때문이었다. 골수 이식을 하려고 하는데 여동생 유전자와 하나가 달라 당시만 해도 보험 적용이 안됐다. 병원에서 “최소 7000만원에서 1억원이 든다”고 한 순간 그는 병원 측에 “그렇게 돈이 많이 드는 거면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치료 거부를 선언했다.


⊙ 백혈병치료 한국 박진석씨 “저만 살겠다고 비싼 골수이식 받을 순 없었죠”

“병원에 이야기했죠. ‘돈도 없고, 계속 치료를 진행할 형편이 안된다. 보험이 되는 것으로만 치료를 해달라.’ 그랬더니 의사가 골수 이식이 아니라 항암치료 방법도 있다는 거예요. 완치율이 얼마냐고 했더니 10~12%래요. 12% 안에 들어가면 되니까 항암치료로 가자고 했죠.”

3차 치료를 마칠 때까지 총 4000만원 정도가 들어갔다. 병원에서 최소 비용으로 잡았던 비용보다 3000만원이나 적었다. 박씨는 보험료로 받은 돈에 친구들이 1일호프를 통해 모아준 돈, 형제들이 도와준 돈을 보태 병원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사실 저도 그때 모르는 게 많아서 비싸게 낸 거예요. 지금은 의학이 발달해 가격은 더 내려갔어요. 생활에 여유가 많이 없으니까 보험도 안 들었거든요. 운전자 보험 하나 들어뒀는데 더 좋은 혜택 있는 게 나와서 해지하려고 했어요. 보험회사에서 해지하는 대신 운전자보험을 종신보험으로 바꿔준다고 하는 거예요. 금액이 제일 낮은 것으로 들라고 추천했어요. 암 진단이나 백혈병 같은 중병에 걸리면 2000만원이 지급된다고. 그래서 중간에 종신보험으로 갈아 탔는데 갈아탄 지 2년2개월 만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거기에서 보험료를 받아 치료비에 보탰어요. 제가 여러모로 운도 좋았죠.”



9개월간 의사 설명 제대로 듣지 못해

지금은 지나간 이야기라 웃으면서 한다지만 생사의 기로에서 무서울 정도로 냉정함을 유지했던 이야기를 듣다보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어떻게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냐”는 질문에 “원래 성격이 아버지를 닮아 긍정적이기도 했고, 한 집의 가장이기 때문에 무겁고,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고 답했다.


“저한테 한심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돈 빌리고 그랬으면 병원비 1억원은 모을 수 있었죠. 그런데 제가 죽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하잖아요. 돈 빌려서 치료 받았는데 제가 죽으면 가족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내가 아이 셋 데리고 막막하죠. 잘 사는 사람들에게는 1억원이나 4000만원이나 큰 차이 없겠지만 저에게는 차이가 컸어요. 현실은 현실이니까요.”


비싼 병원비만 그를 서럽게 한 건 아니었다. 약 9개월 동안 치료를 받으면서 그는 한 번도 속시원하게 의사의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의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아침 회진시간 때 겨우 잠깐 봐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도 의사가 시간이 없으니 답답하죠. 회진 때까지 기다려 겨우 의사를 만나도 충분한 설명은커녕 ‘그런 것까지 알아서 뭐하냐’는 핀잔이 돌아올 때도 있었어요. 의사분들이 바쁜 건 알지만 아픈 사람들은 얼마나 궁금한 게 많습니까?”

치료 방법도 일방적이었다. 박씨는 “내가 의료진의 결정에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하면 그들은 더 이상 내 의견을 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면서 “이런 식으로 하면 치료할 수 없다는 말이 되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강한 사람이었다. 병마와 죽음의 공포, 돈의 3중고에 시달리면서도 강인하게 견딘 그는 결국 하늘이 준 선물을 받았다. 박씨는 현재 백혈병환우회에서 대외협력팀장을 맡아 활발하게 일할 정도로 건강을 되찾았다. 따로 복용하는 약도 없다. 지금은 환자들의 투병 상담을 해주고, 내부가 무균실인 ‘클린카’ 운행을 하며 환자들의 이동도 도와준다.

“죽음의 언덕을 넘어서면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많이 보죠. 전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수많은 헌혈자들로 인해 살았고, 친구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어요. 봉사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찾아다니다가 이곳까지 왔네요.”



스웨덴의 모든 치료비는 1년에 43만3500원

스웨덴의 박정식씨에게는 없지만 한국의 박진석씨에게는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돈 걱정이다. 그렇다면 박정식씨는 골수이식 수술과 간 이식 수술을 받는 데 얼마가 들었을까. 박씨는 두 번에 걸친 대수술뿐만 아니라 각종 MRI 검사부터 초음파 검사, 수술 후 맞고 있는 항생제, 복용하고 있는 비싼 약까지 엄청난 의료서비스를 받았다. 그러나 박씨가 1년에 지불한 비용은 2700크로나(약 43만3500원)에 불과하다.

스웨덴에서는 돈이 없어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거나 의료비로 인해 가정 경제가 파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연간 의료비 상한제’를 시행하고 있다. 의료비 상한제 규정에 따라 총 병원비 중 개인이 부담하는 본인부담금은 최초 진료일부터 1년 안에 최대 900크로나(약 14만4500원)로 제한된다. 이를 초과하는 돈은 광역자치단체가 부담한다. 약값 역시 본인부담액 한도가 정해져 있다. 약값은 연간 1800크로나(28만9000원)까지만 부담하고 초과분은 광역자치단체가 지불한다. 진료비나 약값이 상한액에 도달하면 그 환자는 그 때부터 ‘무료 진료카드’를 받아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제가 입원했던 병원의 입원비가 하루에 80크로나였어요. 입원한 날은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았죠. 그런데 이미 저는 입원하기 전에 받았던 MRI 검사, 초음파 검사 등으로 상한액에 다 도달했어요. 수술비도 공짜였던 셈이고, 이후 맞았던 혈관주사도 다 공짜였던 거죠. 퇴원 후에도 병원의 가정치료팀이 하루에 세 번씩 집에 와서 약을 놔주고 갔어요. 제가 검사를 받으러 갈 때는 교통비도 지급돼요.”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에도 의료 복지제도가 있다. 꽤 탄탄하다. 특히 박진석씨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인정받아 각종 진료비에서 자기부담액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런데도 박씨는 왜 4000만원이라는 고액의 병원비가 들었을까. 심지어 그 돈도 박씨가 비용을 줄이고 줄인 결과다.

“한국은 의료 선진국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이 의료 선진국이란 특징 때문에 돈 없는 사람들은 치료 받기가 힘들어요. 의료 선진국이다보니 각종 최신 의료기술이나 최신 약 등이 잘 도입되는데 이는 보험 적용이 안되는 ‘비급여’거든요. 저 역시 비급여 항목으로 진료비를 거의 다 지출했다고 보면 돼요. 암 수술을 한다고 할 때 의사들은 로봇 수술을 권해요. 최신 방식이죠. 그건 비급여 항목으로 보험 적용이 안돼 가격이 껑충 뛰어요. 대신 의사가 직접 칼을 들고 수술하면 보험 적용이 되기 때문에 가격이 싸요. 저는 의사가 최신 방식을 권해도 ‘싫다’고 거부하면서 무조건 보험이 되는 방식만 고집했어요. 많이 공부를 하고 갔기 때문에 비싼 의료비에서 비켜갈 수 있었던 거죠.”



병마 앞에서 가장 역할 걱정

2007년에 한국에서는 “당신의 보장자산은 얼마입니까?”라는 한 보험회사 광고 문구가 큰 인기를 끌었다. 이 광고 때문에 당시 개념조차 생소했던 ‘보장자산’이란 말이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보장자산이란 가정의 주 소득을 책임지던 가장(家長)의 사망이나 질병 사고가 발생할 때 가족이 받을 수 있는 자산을 말한다. 가장의 소득이 가구 소득의 대부분을 차지해 가장이 쓰러지면 곧바로 가정이 쓰러지기 쉬운 한국에서 보장자산 상품은 큰 성공을 거뒀다. 보장자산이 화제가 되면서 많은 가장들은 보장자산에 따른 스트레스를 토로하기도 했다. “보장자산을 준비 못한 가장은 마치 무책임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잖아요.”


박진석씨 역시 이 가장의 무게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죽음의 공포로 정신을 차리기 힘든 와중에서도 철저하게 예산 계획을 세웠던 이유도 바로 가장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제가 환우회에서 일하면서 받는 월급과 아내가 받는 월급, 기초생활 보조금에 형제들이 십시일반 도와주는 돈으로 여유있는 생활은 아니지만 세 아이 키우면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고마운 마음이 크니까 사실 ‘돈’보다 더 의미있고 중요한 게 많다고 느껴요.”


박정식씨 역시 스웨덴에서 장모와 아내, 두 자녀를 둔 가장이다. 그러나 그가 암 진단을 받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도 그의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상병수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에릭슨이라는 대형 전자회사에 다녔거든요. 2006년 병 진단을 받았을 때 제 연봉이 약 2만9000크로나였어요. 제가 암으로 불가피하게 직장에 못나가게 된 거라서 처음 14일간은 회사에서 현재 소득의 80%를 지급했고, 그 이후 200일 동안은 사회보험에서 일하는 날을 따져서 월급의 80%가 나왔습니다. 그 기간이 지나면 70%의 월급이 나와요. 직장에 못나간 지 3년 이후부터는 64%의 월급이 나옵니다. 은퇴 나이인 65세가 지나면 연금으로 전환되지요. 생계나 이런 걱정 없이 건강 회복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거죠.”



아파도 계층 하락 없는 나라

박진석씨는 “한국 의료보험제도에 부족한 점이 많지만 개선되고 있다”고 말했다. “조금만 더 공공성을 높여 중병에 걸려도 계층 하락이 안됐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한국에서 큰 병에 한 번 걸리면 중층이 하층 되고, 하층은 빈민층이 되기 쉬운 구조거든요.”


스웨덴은 박진석씨가 꿈꾸는 것처럼 아파도 계층 하락이 없는 나라다. 의사와 환자가 ‘돈’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긴장관계에 놓이지 않기 때문에 심리적인 거리도 훨씬 가깝다.

지난 6월2일 찾았던 스웨덴의 나카 노인전문병원. 병원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기자를 마주칠 때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손을 흔들며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그들의 얼굴이 담긴 큰 사진이 이름과 함께 액자에 끼워져 층마다 복도에 걸려 있었다. 환자들이 의료진의 이름과 얼굴을 쉽게 익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노인성 질환은 젊은 사람들과 달리 복합적인 증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 치료도 보완적으로 이뤄져야 효과적이다. 입원 치료 기간이 길어지는 경우도 많다. 일반 병원에서 장기 입원을 하는 노인 환자가 많아지면 응급환자를 받을 병실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고자 노인전문병원들이 생겨났다.

환자들이 머물고 있는 병실은 온기가 느껴졌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구부리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환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진료가 끝난 후에도 병실을 떠나지 않고 환자의 농담까지 다 들어주면서 같이 웃어주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기자에게 병실을 안내해주던 간호사는 “의사나 간호사들이 진료하면서 ‘할머니는 나이를 먹어도 소녀같이 예쁘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늠름하고 멋있다’ 이런 말들을 많이 해주니까 병원 안에 공주병, 왕자병에 걸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다”며 웃었다.


병원은 1인실에서 4인실까지 총 91개의 병상을 가지고 있지만 1인실과 4인실의 구분은 한국처럼 ‘돈’의 개념이 아니다.

1인실은 감염성이 있어 격리 수용이 필요하거나 소음을 일으켜 다른 환자들에게 피해가 될 수 있는 환자에게 제공된다. 환자의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 의료시설 이용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환자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스웨덴의 의료서비스 체험을 한 박정식씨는 “국가와 병원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처음에 회사에 다니면서 일할 때는 원망도 많이 했거든요. 세금을 많이 떼가니까. 직장 안다니는 사람들도 잘 먹고 잘 사는데 내가 힘들게 번 돈으로 세금을 내는 게 아까웠어요. 지금은 당연히 그런 생각 안해요. 제가 국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가 되어보니까 저절로 알게 되던데요. 한국에서 제가 이렇게 회사 다니다가 아팠으면 당연히 망했을 거란 생각 많이 해요. 병원비를 감당해야 하고, 직장에 못다니니까 돈도 못벌잖아요. 스웨덴은 능력이 있든 없든, 돈이 있든 없든 한 개인 개인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대우해주는 나라예요.”

고통의 터널을 지나 서서히 다시 삶의 빛을 찾아가고 있는 박씨는 인터뷰 내내 “감사하다”는 말을 유독 자주 했다.

“정말 고마운데 제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그래서 병원 병동에 빵 같은 것 돌려요. 고맙다고 말하면서. 의사들이나 간호사들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건데 왜 빵까지 주느냐고 의아한 반응을 보여요. 그러면서도 저의 고마운 마음을 느끼고 다른 환자들에게 더 잘해주려고 노력해요. 이런 관계를 두고 윈·윈이라고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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