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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웨덴(스톡홀름) | 유희진기자 worldhj@kyunghyang.com

ㆍ스웨덴과 한국의 장애인복지 

◆ “학교·이사갈 집마다 저를 위해 공사를 해줘요” 스웨덴의 베른트

스웨덴 스톡홀름시 시청 공무원인 멀린 베른트(36·여)는 태어날 때부터 다리에 장애가 있었다. 걷지 못한다. 한국에서 장애여성네트워크 기획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박현희씨(30·여)도 베른트처럼 다리가 불편한 신체 장애인이다. 7년 전 사고로 그녀의 다리는 그녀의 몸무게를 지탱할 힘을 잃었다.


베른트와 박씨는 멀리 떨어진 대륙에서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지만,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30대 여성이다. 다리가 불편한 신체장애인이기도 하다. 신체적 장애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열정적으로 매진하는 모습도 닮았다. 대화를 시작한 지 10분도 안돼 사람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도 비슷하다. 이들의 긍정적인 생각과 열정적인 태도는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을 단박에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강인하게 만들었을까.

“장애인으로 살면서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밝고 열정적인 성격을 가질 수 있었냐”는 질문에 스웨덴의 베른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대답했다.

“지금까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으니까요. 공부도 마음껏 했고, 18살이 됐을 때는 다른 친구들처럼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 자유로운 삶을 영위했어요. 의미있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서 보람도 있죠. 물론 다리가 불편한 만큼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라에서 그 불편한 부분을 채워주었기 때문에 금방 적응하고 새로운 도전을 해나갈 수 있었어요.”


반면 한국의 박씨는 “나는 조금 특이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주위에서 저에 대해 특이한 경우라고 이야기해요. 먼저 장애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매우 빨랐어요. 3년밖에 걸리지 않았거든요. 또 밝고 명랑한 성격도 도움이 많이 됐어요. 타고난 성격이죠. 사고 후에 3년 가까이 집에서 고립돼 생활하다가 그 고립을 벗어던지자고 결심했을 때 마침 장애여성네트워크라는 좋은 단체를 만나 도움을 많이 받았죠. 하고 싶은 일을 금방 찾았어요. 보통은 이렇지 않아요. 워낙 한국은 장애인이 살기 힘든 나라니까요.”

베른트의 ‘열정’과 ‘긍정적인 생각’은 사회적인 시스템이 뒷받침된 결과다. 그러나 박씨의 ‘열정’과 ‘긍정적인 생각’은 온전히 그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박씨 표현대로 그녀는 잘 타고났다.



스톡홀름-“이동에 불편했던 적 없어요”

지난 6월3일 오후 2시. 베른트는 스웨덴 스톡홀름시 시청 정문 앞에서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인사, 따뜻한 포옹을 나눈 후 베른트는 휠체어 바퀴를 밀며 “사무실로 가자”며 앞장섰다. 시청 정문에서 3층에 있는 베른트의 사무실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2분. 그 시간 동안 휠체어를 탄 베른트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 한 번의 덜컹거림도 없이 미끄러지듯 흘러갔다. 시청 건물 바닥은 휠체어가 부드럽게 지나갈 수 있도록 잘 닦여 있었다.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장애인들에게 이동권 문제는 생활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죠. 저는 이동권 문제로 고생해 본 기억이 없어요. 지금도 스톡홀름시는 더 좋아지고 있거든요. 스톡홀름시에서 장애인들이 좀 더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더 좋게 만들고 있어요.”

베른트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녀가 입학하기로 예정된 초등학교는 분주해졌다. 그녀가 불편함 없이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층계로 되어 있던 통행로에 새로운 휠체어 길을 만들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가 다닌 학교에서는 그녀를 위해 엘리베이터와 휠체어 길을 미리 만들어놓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저도 제가 일반 학생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차별 없이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어서 기뻤죠. 40년 전만 해도 장애인들은 연수원 같은 기관에서 따로 교육을 받았다고 해요.”


고등학교 졸업 후 운전면허를 딴 뒤부터는 좀 더 수월해졌다.

“저희 같은 신체 장애인들이 자동차 연수를 받는 특별운전학교가 있어요. 연수받는 비용은 무료예요. 손으로 작동할 수 있게 특수 제작된 자동차로 연수를 받아서 면허를 땄죠. 4주 만에 운전면허를 따고 새 차를 살 때도 나라에서 보조금이 나왔고, 그 차를 제 신체적 조건에 맞게 개조하는 비용도 나라에서 대줬어요.”

베른트는 다른 친구들처럼 18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 집에서 독립해 나왔다. 부모님이 “우리끼리 살면 쓸쓸한데 계속 같이 살면 안되겠냐”고 말렸지만 혼자 사는 삶을 만끽해보고 싶었다. 그녀가 이사갈 주택을 고르자 지방정부는 그 집을 그녀가 살기 편하게 고쳐주었다. 집 입구 쪽에 있던 층계 두 개를 없애고, 평평한 휠체어 길로 바꿔주었다. 화장실도 전부 개조했다. 싱크대는 그녀의 높이에 맞춰졌고, 주방 찬장도 자유자재로 높이 조절이 가능해 그녀가 혼자서 장을 보고 음식을 조리하는 데 지장이 없다.

“장애인들은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붙어 지낼 수밖에 없죠. 부모님들이 옆에서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고맙고 미안하지만, 답답한 것도 있어요. 그래서 혼자 살아보고 싶었어요. 부모님 집과는 약 300m 떨어져 있어요. 제가 부모님 집에 놀러가기도 하고, 부모님이 제 집으로 놀러오시기도 해요.”

베른트의 취미는 ‘여행 다니기’다. 지금까지 약 15개국을 여행했다. 베른트는 동행인이 필요 없어서 혼자 여행을 다니지만, 장애인에게 돌봐줄 동행인이 필요하면 나라에서 동행인의 비행기표 값을 다 지불해준다. 그녀는 가장 인상 깊은 여행지로 하와이의 조그만 섬을 꼽았다.

“정말 환상적인 섬이었어요. 한 번 가보면 좋을 텐데….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이동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던 나라는 없었어요. 언젠가 서울도 꼭 한 번 가보고 싶어요. 서울은 어떤가요? 제가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데 어려움은 없나요?”



서울-“밖에 나가기가 무서워요”

베른트가 환하게 웃으며 던졌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로부터 2주 후인 6월18일 서울 여의도에서 박현희씨로부터 들었다.


“혼자서 밖에 나가면 사방에서 저를 공격하는 것 같아요. 혼자서 밖에 나가기 무섭죠. 직접 저랑 함께 보실래요?”


여의나루역 근처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박씨는 전동 스쿠터에 몸을 싣고 여의나루역을 향해 앞장섰다. 카페에서 여의나루역까지는 약 10분 거리. 카페 건물을 나서자마자 험난한 여정이 시작됐다. 울퉁불퉁한 길 때문에 박씨의 몸은 전동 스쿠터 위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경사진 길에서 박씨의 몸이 한쪽으로 쏠릴 때마다 잡아줘야 할 것만 같아 무의식중에 두 팔이 자꾸만 뻗어 나갔다. 길에는 온갖 턱이 있었다. 턱 높이 규정은 2㎝지만 그 기준에 맞는 턱은 하나도 없다. 거의 5㎝를 훌쩍 넘는다. 이 때문에 턱을 지나갈 때마다 박씨의 몸이 전동 스쿠터 위에서 폴짝 솟아오른다. 그 모습에 깜짝 놀라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박씨가 뒤돌아보며 묻는다.


“방금 봤어요? 몸 솟은 거 봤어요? 매일 이렇다니까요. 이렇게 머리가 계속 흔들리니까 집에 가면 두통 생기고 머리가 어지러워 책 한 장 읽기 힘들어요.”


경사가 심한 길을 지나 이제 괜찮은가 싶으면 길 곳곳에 세워져 있는 자동차 차단봉이 전동 스쿠터를 막는다. 좁은 폭으로 세워져 있어 사람 한 명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정도다. 우여곡절 끝에 여의나루역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러나 고생이 끝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장애인 박씨가 있는지 없는지 신경쓰지 않았다. 사람들이 우르르 먼저 타면 박씨는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야 한다.


“늘 있는 일이에요. 아침 출근시간 때는 사람들이 먼저 앞으로 나가 타면서 저한테 그래요. ‘아가씨는 나중에 타요.’”


그녀의 집은 인천, 직장은 서울 대방동이다. 일주일에 3번 출근하는 길은 고행길이다. 남들은 40분이면 갈 수 있지만 박씨는 2배 걸린다.

“그것도 제가 시간을 단축하려고 노력을 많이 한 결과예요. 이를테면 사무실이 있는 대방역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전화해요. 10분 뒤에 도착하니까 미리 리프트 준비해놓으라고 말하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대방역에 도착해 직원을 호출하는 데 한참 걸리고, 그들이 리프트 내려서 준비하는 데 또 한참 걸려서 대방역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데만 30분이 넘게 걸리거든요.”

지난 2월에는 대방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한다는 이유로 사전 공지 없이 리프트를 철거해 대방역 측과 긴 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어느날 전화했는데 엘리베이터 설치할 때까지 6개월 넘게 리프트가 없으니까 신길역에서 내려서 가라는 거예요. 신길역에서 사무실까지는 길이 너무 위험해서 코레일 서부지사에 ‘대안 마련하라’고 항의했어요. 처음에는 안전바도 없는 임시 휠체어 리프트를 타라고 해서 내가 ‘위험해서 안된다’고 하자 2번 정도 공익요원 4명이 저를 들어서 올리고, 그러고 나서야 장애인용 리프트를 다른 곳에 설치해줬어요.”

장애인들을 위한 저상버스도 장애인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박씨는 “저상버스의 배차 간격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버스 운전기사들은 “슬로프가 고장났으니 다음 버스를 타라”며 그냥 지나쳐버리기 일쑤다. 심지어 저상버스를 몰면서 슬로프를 내리는 방법을 몰라 쩔쩔매는 운전기사들도 있다.



◆ 한국의 박현희씨 “사고 후 대학도 포기… 3년간 집에서만 지냈죠”

교육과 취업의 높은 벽

장애인들에게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권리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게 교육권과 노동권이다. 베른트는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시청 체육과 공무원으로 취업했다. 그녀도 직업을 선택할 때 걱정과 고민이 있었다. 교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사범대학에 진학했지만, 막상 교사가 될 생각을 하니 현실적인 벽이 느껴졌다. 마음껏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를 포기하는 대신 대안적인 직업을 선택했다. 그녀가 하는 일은 아동과 청소년들이 여가시간을 더 잘 보낼 수 있도록 ‘신체를 활용한 여가시간 보내기’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일이다. 신체가 불편한 아동들에게 신체활동의 중요성을 알리고 독려하는 일도 맡고 있다. 그녀는 신체 부자유가 일에 지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장애인 수당을 받지 않고, 공무원 월급을 받아서 생활한다.


“직업 구할 때 장애인들은 일을 잘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런 편견에 가로막힌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박씨는 23살 때 사고를 당하고, 신체 장애 판정을 받자마자 다니던 대학을 그만뒀다. 학교에 장애인이 다닐 만한 시설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박씨를 따라다니며 수발해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장애여성네트워크에서 자긍심이 낮아 표현이 서툰 장애인들이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도 하고 있다. 박씨는 “학원 강사를 하는 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데 내 월급과 동생 월급으로 월세를 내고 생활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고 말했다. 월급으로 한 달에 10만원쯤 들어가는 진통제와 약값도 충당하고 있다.



그러나 박씨가 강조했던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 박씨의 삶은 예외적인 경우다. 한국에서 많은 장애인들은 자신들의 노동권과 교육권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

보건복지가족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08년 장애인 실태조사 보고서’의 장애인 교육정도에 따르면 등록 장애인 기준으로 초등학교를 다닌 장애인은 83.8%이지만 졸업자는 33%에 불과하다. 중학교 졸업자는 15.9%, 고등학교 졸업자는 24.4%, 대학교까지 마친 사람은 10.2%밖에 안된다. 학교를 다니지 않은 ‘무학’층도 16.5%나 된다. 학년이 올라가며 학업을 포기하는 비율이 높다. 이들이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중학교 과정을 포기한 장애인들 중 75%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학업을 중도 포기했다’고 답했다.

대부분의 스웨덴 대학생들은 18살 때 부모로부터 독립하면서 경제적 독립도 한다. 이 때문에 대학생들은 보통 등록금 대출을 받아 학비를 해결한다. 하지만 베른트는 무상으로 대학교육까지 마쳤다. 많은 신체장애인들이 직업을 얻는 데 어려움을 겪자 ‘더 많이 공부해서 취업 기회를 더 넓히라’는 취지로 1992년부터 장애인 대학생 무상 교육제도를 실시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장애인들의 취업 현실은 암담하다. 15세 이상 장애인의 경제활동참가율은 41.1%에 불과하다. 특히 여성장애인들의 취업률은 인구대비 23.7%밖에 안된다. 취업을 했다고 해도 이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취업 장애인의 45.5%는 어려운 점으로 생활 유지가 힘든 ‘낮은 수입’을 꼽았다.


박씨는 이에 대해 “한국은 일을 하고자 하는 장애인들의 의지를 꺾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보통 취업한 장애인들은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경우가 많아요. 80여만원을 받죠. 그런데 장애인들은 아픈 사람들이 많잖아요. 80여만원 벌어서 40만원을 병원비로 쓰고 10만원쯤을 약값으로 쓰죠. 그런데 1급 장애인이 일을 안하면 기초생활수급비에 1급 장애인 수당까지 약 60만원을 벌거든요. 그러니까 직장에 나가는 비용 등까지 생각하면 차라리 집에서 노는 게 남는 거예요.”

박씨는 “사고가 나고 3년간 집에서만 지냈다”면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일을 갖지 못한 장애인들은 집에서 고독하게 시간을 보낸다”고 씁쓸해했다.

“그러다보면 점점 더 자신을 외부에 내보이는 게 어색해지고, 가족들도 그들을 내보이는 것을 꺼리죠. 그렇게 장애인들은 이 나라에서 없는 사람들이 되어가는 거예요”



장애인 없는 한국?

장애인들이 숨어 사는 나라 한국. 한국에서 국제장애인대회 같은 것을 하면 외국인들이 꼭 물어보는 말이 있단다. “한국에는 장애인이 별로 없나 봐요?” 박씨는 “장애인들이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의 차별적인 시선”이라고 말했다.

박씨의 전동 스쿠터 앞에는 경고문이 하나 붙어 있다. ‘가격 묻지 마라, 짜증난다.’ 그녀의 고통을 한 번에 보여주는 구절이다.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이 전동 스쿠터를 만지면서 ‘이런 거 얼마나 하냐, 얼마 주면 살 수 있냐’고 거리낌 없이 물어보거든요. 나를 너무 쉽게 보는 것 같아 화가 나죠. 그뿐 아니라 제가 항상 척추 교정기를 하고 있는데 제 몸도 함부로 만지고 그래요. ‘이건 뭐냐’ 이러면서. 그래서 세게 나가기로 했죠. 이렇게 붙인 후로는 가격을 물어보는 사람이 없어요.”

사람들의 차별적인 행동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더욱 강하게 단련하고 있는 듯 보였다.



스웨덴은 어떨까. 6월6일은 스웨덴의 ‘국기의 날’로 국경일이었다. 행사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스톡홀름 시내로 몰려나왔다. 대형 쇼핑몰도 휴일을 맞아 쇼핑을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을 피해 지나가던 순간 한국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던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 의류매장에서 휠체어에 앉은 장애인이 쇼핑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은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었다. 그녀 옆에는 그녀를 도와주는 두 여성이 서 있었다. 한 여성이 그녀를 향해 회색 티셔츠를 들어올렸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거렸다. 티셔츠는 쇼핑 바구니로 직행했다. 옆에서 다른 여성이 그녀를 향해 줄무늬 블라우스를 보였다. 휠체어에 앉아있던 그녀가 블라우스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외면해버린다. 선택받지 못한 블라우스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시내를 돌아다니다보면 적어도 20분에 한 번은 휠체어에 앉아 있는 장애인들을 마주친다. 버스를 타기 위해 휠체어에 앉아 기다리는 장애인들의 모습도 쉽게 볼 수 있고, 한적한 바닷가에서 산책을 즐기는 모습도 눈에 많이 띈다. 이 도시에는 장애인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한국의 번화가에서는 장애인을 보기 어렵다. 박씨와 여의도에서 인터뷰를 하고 종로로 돌아오던 길. 박씨와 나눈 대화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아 머리 속의 절반은 ‘한국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생각으로 차 있었다. 부지런히 주변을 눈여겨봤다. 수많은 사람들과 맞닥뜨렸지만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장애인은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베른트는 “장애인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차별이 100% 해소됐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거의 없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제가 대학교까지 일반학교를 다녔는데요. 스웨덴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장애인과 함께 생활을 하면 자신의 아이가 더 많이 배우고, 같이 어울려 살면서 삶이 더 풍부해진다고 생각해요. 학교를 다니면서는 당연히 차별을 느껴본 적이 없죠. 한국에서는 장애인 형제를 둔 사람이 결혼을 하는 데도 어려운 점이 있다고 들었어요. 스웨덴은 확실히 그 단계는 지난 것 같아요. 제가 장애인이란 사실을 부끄럽게 여길 만한 일도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했어요.”


그녀에게도 고민은 있을까. 베른트는 “있다”고 말했다.

“연애를 하게 되면 어떻게 할까. 그런 고민해요. ‘애정’ 문제에 대한 게 가장 큰 고민인 것 같네요.”



임종까지 책임지는 보호시설

베른트는 다리만 불편할 뿐 생활하는 데 문제가 없기 때문에 혼자 생활할 수 있지만, 혼자 생활하기 힘든 정신 및 지체장애인들은 보호시설에서 생활한다. 보통 보호시설에 입소하면 집세로 평균 월 2500크로나(약 40만1750원)를 지불해야 하지만 중증 장애인들은 사회보장사무소로부터 장애수당과 장애인복지서비스수당 등을 받기 때문에 그 돈으로 집세를 해결한다.

6월3일 오후 1시쯤 정신 및 지체장애인 4명이 함께 거주하고 있는 그룹홈(group home)을 찾았다. 그룹홈은 녹색 평원이 펼쳐진 그린벨트 인접 지역 주택가에 있었다. 그룹홈 측에서 “중증 장애인들이라 인터뷰나 접촉은 힘들다”고 난색을 표해온 터라 거주하고 있는 장애인들이 직업 활동을 하러 나간 시간에 맞춰 그룹홈을 방문했다. 중증 장애인이라도 사회활동을 하는 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들은 하루에 몇시간씩 장애인 작업장에서 일을 한다. 이곳에서 장애인들을 돌보고 있는 마리 일데린이 기자를 맞았다. 이곳에는 일데린을 포함해 6명의 직원들이 그룹홈에 상주하며 장애인들을 돌보고 있다. 그룹홈이 공립시설이기 때문에 이들은 모두 공무원이다.

“늘 저희들이 옆에 붙어서 보살펴줘야 하는 사람들이죠. 판단력이 부족하거든요. ‘설거지를 하세요’라고 하면 설거지를 해요. 그런데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줄 몰라요. 씻은 걸 또 씻고 그러죠. 설거지가 언제 끝나나 살펴보다가 ‘이제 다 했으니까 그만해도 됩니다’라고 이야기를 해주는 거예요.”

그룹홈은 질서정연한 모습이었다. 4명이 사용하는 독립된 방, 넓은 거실과 휴게실, 세탁실과 주방이 있었다. 그룹홈에는 인지 능력이 부족한 장애인들을 위해 몇가지 규칙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 공간에서 ‘월요일’을 가리키는 상징은 ‘초록색’이고, 파랑색은 화요일을 상징한다. 선명한 색깔은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다.

일데린의 안내에 따라 한 지체·정신 장애가 있는 남성의 방에 들어갔다. 방 주인은 헨케(47)였다. 50㎡(15평)의 공간에는 침실과 주방, 작은 공부방까지 있었다. 그의 일주일 시간표가 그림으로 그려 벽에 붙여져 있어 일주일 생활 패턴이 훤히 보였다. 방은 깔끔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일데린은 “우리와 함께 방을 청소하거나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헨케의 어머니가 와서 청소를 해주고 간다”고 설명했다. 방은 그를 위한 맞춤형 공간이었다. 몸이 불편한 그가 편히 사용할 수 있도록 침대는 리모컨으로 올리고 내리고 하는 조정이 가능했다. 뒤처리가 어려운 그를 위해 화장실 변기에는 비데가 설치돼 있었고, 안전바도 그의 동선을 고려해 곳곳에 설치돼 있었다. 일데린은 “그의 신체적 조건을 고려해 만든 방”이라면서 “침대 옆에 있는 전등 하나도 그가 자다가 손으로 밀어서 다치는 일이 없도록 거리를 조정해 배치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함께 게임도 하고 요리도 하고, 직원들과 함께 장도 보러 가면서 하루를 보내요. 집 앞에 씨를 심고 식물을 기르기도 하죠. 자신들이 심은 씨앗에서 식물이 나는 것을 지켜볼 때 제일 기뻐하는 것 같아요.”

이들은 한 번 그룹홈에 들어오면 이곳 직원들과 다른 장애인들을 인생의 동반자 삼아 살아간다.

“거의 형제 남매처럼 지내는 거죠. 서로 의지하면서. 한 번 들어오면 주욱 이곳에서 지내니까 그 사이 부모님이 돌아가시기도 하고, 혼자가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우리 직원들이 이 장애인들의 부모가 되는 거예요. 죽을 때 우리가 지켜봐주는 거죠.”

스웨덴의 그룹홈 이야기를 듣던 박씨가 “나도 집에서 도와주고 보살펴줄 사람이 없어 그룹홈에서 지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요. 지적 장애인 등 5명이 함께 지내는 곳이었는데 말 통하는 사람이 없어서 답답하고, 특정 종교를 믿으라고 강요하고, 심지어 장애인 그룹홈인데 화장실에 안전바도 없었어요. 보통 한국의 이런 곳들은 예산이 부족하고 영세하니까 그래요. 그래서 결국 나와서 혼자 살 길을 다시 찾아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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