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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휼이 죽었다.

“무휼은 조선제일검이니, 능히 무사 200을 당하느니라.” 방원이 아들 이도에게 자신의 호위무사를 넘겨주면서 한 말이다.

“네, 무사 무휼, 주상의 명을 받자옵나이다.” 상왕이 된 방언이 세종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협박하자, 만약 자신이 죽으면 주저 없이 칼을 휘두르라고 세종이 내금위장에게 명하였을 때, 무휼이 했던 말이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난 이 장면이 제일 좋았다. 방원의 호위무사였지만, 그가 왕위를 넘기면서 모시는 주인이 바뀌었다. 옛 주인에게 칼을 휘둘러야 하는 무휼의 아픔, 그게 바로 공무원이다.

김영현 작가의 드라마에는 공무원들이 아주 많이 나온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지진희가 종사관 역을 맡아서 강직하고도 순정한 무관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선덕여왕>이나 <서동요>에도 그 시대의 수많은 고급 공무원(?)들이 나왔다.



김영현의 드라마에는 주제의식이 비교적 또렷한데, 드라마의 결로만 치면 김수현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유야 어쨌든 세종이 한글을 만들 때, 이걸 막으려던 비밀결사 밀본과 세종의 명을 받는 공무원 사이의 한판 승부. 그걸로 이만한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니 김영현과 한 시대를 살 수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대책 없이 행정용어를 영어로 ‘찍찍’ 갈기던 시대는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DJ 때는 한국을 ‘다이내믹 코리아’라고, 아예 이름 자체를 공모했다. 참여정부 때는 ‘로드맵’이라는 말이 아주 국정을 도배하고 있었다.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 작동하게 해야 한다, 이것도 일종의 관념이라고 생각한다. 중앙정부가 이 난리를 치고 나니, 지방정부는 정말 황당하게 했다. 문법에도 맞지 않는 ‘하이 서울 페스티벌’이 이명박 시대의 서울시 행정 중 가장 웃기는 일이라고 기억된다.

요즘은 문화연대가 많이 약해졌다. 단체 상근하던 시절, 하이 서울 페스티벌을 막기 위해 문화연대와 같이 일했던 것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장면 중의 하나이다. ‘다이내믹 부산’ 등 과연 이 나라가 한글이라는 자신의 글자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황당한 이름들이 횡횡한다.
<뿌리깊은 나무>(뿌나)를 방영하는 날을 ‘뿌요일’이라고 부를 정도로 ‘뿌나’ 폐인들이 지지했던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는 끝났다. 일단 정권 바뀌면 한글날부터 공휴일로 만들고, 꼭 필요하지 않은 행정용어들은 가능하면 쉽고 편안한 우리말로 바꿔나가면 좋을 것 같다. 한국어 능력시험도 강화해서, 어지간한 공기업의 입사에서의 영어 점수는 한국어 능력 점수로 바꾸어 나가는 게 좋을 듯싶다.

그 나라 공무원이 그 나라 말을 잘하는 게 맞지, 영어를 잘하는 게 맞는 건 아니라고 본다. 90년대 중후반, 한동안 영어가 유행하면서 별 말도 아닌 이상한 영어 단어 섞는 게 유식해보였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어린쥐’ 정권도 등장하고, 초등학생들이 영어 공부하느라고 요즘 난리도 아니다. 우리말, 한글, 이런 눈으로 보면 현 정권은 법통도 없고 계통도 없고 그냥 ‘어린쥐’를 숭상하던 ‘뿌리 없는 잡것’들의 정권이다.

그렇다고 한글을 우상화시켜서 강력한 쇼비니즘으로 복귀하자는 말은 아니다. 한글을 다시 공휴일로 지정하고, 한글이 가진 ‘소통’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보는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한다. ‘공감’이라는 고급스러운 개념은 고사하고, ‘소통’이라는 말 그리고 공론장이라는 말이 위기에 처했던 한 정권이 끝나간다. ‘하이 서울 페스티벌’과 함께 이명박의 ‘뉴타운’ 여기에 뒤이어 ‘휴먼타운’까지, 결국 말이 오염되면 행정도 오염되고, 공무원들도 같이 오염된다.

오염된 공무원을 금방 알아보는 건, 말 중에 불필요한 영어 단어를 얼마나 섞어 쓰나, 그리고 골프를 얼마나 자주 치나, 이것만 보면 된다. ‘영어+골프=나이스 샷’! 나이스 샷 외치는 고급 공무원들이 골프장에서 업자들과 결탁하면서 민주당 정권이 실패했고, 이명박 정권도 역시 붕괴 직전이다. 현장에서 나도 많은 공무원들을 만나는데, 이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제일 쉽고 빠른 시간에 파악하는 방법이 얼마나 영어를 ‘찍찍’ 쓰는가, 그리고 골프에 대한 얘기를 얼마나 많이 하는가, 그 두 가지였다.

박원순, 최문순, 김두관, 송영길 등 최근 단체장으로 업무 중인 분들에게 자신과 일하는 3급 이상 고위직들 중 과연 무휼이 있는가, 한 번 살펴보시길 바란다. 아울러 얼마나 많은 자신의 동료들이 골프광인지, 한번쯤 살펴보시길. 골프 치는 공무원이 부패하지 않기,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만큼 어려운 일이다. 지금 외환은행 목숨 줄을 쥐고 있는 금융위원회 김석동 위원장이 대표적인 골프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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