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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수기자 soo43@kyunghyang.com

ㆍ2020년 한국사회 상상



정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경향신문은 머지않은 미래에 정치적 선택을 통해 바뀐 세상을 가상으로 그려봤다. 어렵지만 불가능한 상상은 아니다. 순진한 발상도 아니다. 우리보다 앞서 이 길을 갔던 다른 나라들의 사례가 그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최근 집권한 유럽의 우파 정권들은 ‘좌파정책’을 흡수해 다시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았는데 이것이 꼭 남의 일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 2020년 5월24일 출근길의 김현수씨(50)의 표정은 밝았다. 한살배기 늦둥이 아들 시현이가 새벽까지 잠을 안자고 속을 썩였지만 전혀 힘든 줄 모르고 집을 나섰다. 김씨는 서울 강동구에 있는 제과공장에서 25년째 일하고 있다. 직책은 주임. 설탕과 밀가루를 투입하는 공정에서 주로 일한다. 출근시간은 오전 7시다. 대부분의 동료들보다 이른 편이다. 작업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오후 3시가 되면 퇴근한다. 마무리는 오후에 출근하는 동료가 담당한다.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평사원이던 시절 김씨는 오전 8시30분에 출근해 10시간 넘게 일했다. 일감이 몰리면 주말에도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은 언제나 빠듯했다. 첫째딸 효진이(18)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하고, 둘째딸 현진이(15)가 다니는 어린이집에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아내 이명희씨(45)가 봉제공장에서 일을 해 교육비에 보탰지만 은행 잔액은 언제나 아슬아슬했다.

김씨의 삶은 10년 만에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이 어울릴 만큼 바뀌었다. 김씨는 “삶의 질을 바꾸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며 “그냥 나 같은 서민들에게 도움이 되겠다 싶은 후보가 있었고, 그 후보에게 표를 던졌을 뿐”이라고 말했다.


# 복지국가의 시작
변화는 그 해 투표장에서 시작되었다. 총선에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전면적으로 실시된 해였다. 후보 개인이 아니라 정당의 노선과 정책, 그 정당의 비례대표 후보를 살펴보고 여러 정당 가운데 한 정당을 골라 투표를 한다. 정당은 정체성이 모호하던 과거와 달리 자기 노선을 분명히 제시했고, 그 결과 보수 일색의 정당 사이에 작은 진보정당이 장식품처럼 놓여 있는 과거 낡은 정당 구조는 깨지고, 노선별로 분명히 분화된 새로운 정당 구조가 형성되었다. 어느 쪽에 투표를 해도 오십보 백보인 과거 상황과는 다른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정당들이 등장하자, 바닥권이던 투표율은 폭발적으로 높아졌다.

물론 김씨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김씨는 “진보 정당들의 공약이 마음에 들기는 했는데, ‘저게 실현 가능한 것인지’ ‘저대로 하다가는 나라 망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며 “그러나 이번 한번만 눈 딱 감고 믿어보지 하는 생각에 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그 해 뜨거운 참여 열기로 진보와 중도 노선의 정당들은 총선에서 대거 약진했다. 국민들이 어떤 계기로 그런 선택이 이루어졌는지 전문가 사이에서도 아직 논란이 분분하다. 어쨌든 우파를 제외한 정당간 연정이 구성되었고, ‘복지국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도출되었다.

# 복지가 먼저냐, 증세가 먼저냐. 사회적 합의는 있었지만 막상 복지국가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세금 인상’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한국인들은 2008년 전 세계를 덮친 세계금융위기 등을 통해 ‘시장의 불완전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학습했다. 또 시장을 보완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이 필수적이란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정부가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자, 복지국가 목표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1년 내내 정치권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선복지 후증세’와 ‘선증세 후복지’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결국 공은 정부와 국회로 다시 넘어갔다. 정치 지도자의 결단, 정당의 지도력에 의해 전면적인 복지정책 도입으로 결론이 났다. 증세는 여론을 살펴가며 점진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연정에 참여한 각 정당들이 총선에서 공통적으로 내걸었던 ‘공교육 확대’ ‘노동시간 축소’ ‘공공의료 확대’ ‘정부의 책임보육’ 등이 정책으로 구체화됐다. 노동시간과 조건 등을 놓고는 정부, 노동계, 재계 사이에 역사적인 ‘사회적 대타협’도 성사됐다.

# 교육은 사회의 몫 김씨는 지난해 막내아들 시현이를 얻었다.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아내와 상의해 낳기로 했다. 최근 두 딸의 생활을 보며 “이런 환경에서는 아이를 더 낳아 키울 수도 있겠다”란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김씨의 두 딸 효진이와 현진이는 현재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닌다. 아이들은 누가 깨우지 않아도 아침에 먼저 일어나 등교 준비를 한다. 학교 가기가 즐거워졌기 때문이다. 효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효진이는 아침마다 학교에 가기 싫어 떼를 썼다. 풍족하지 않은 살림에 학원까지 다녔다. 학원에 가지 않으면 친구를 만날 수조차 없었다. 김씨는 “ ‘앞으로 입시 경쟁이 더 심해질텐데 불쌍해서 어떻게 보나’라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러나 효진이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더 이상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을 하는 것도 아니다.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싶다는 효진이는 학교와 시립 도서관을 오가며 혼자 대입준비를 하고 있다. 2년 전부터 대학 제도가 전면적으로 개편된 덕분이다. 전국의 모든 국·공립대학은 현재 평준화 수순을 밟고 있다. 앞으로 정부의 교육 재정이 국·공립대학에 집중 투입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대학 입시 역시 바뀌었다. 여전히 경쟁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전과 같은 살인적인 경쟁은 아니다. 효진이는 “고등학교에서 졸업에 필요한 학점은 모두 획득한 터라 지금은 대학 역사학과에서 요구하는 에세이 준비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효진이가 역사 외에 전혀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효진이는 혼자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를 배우고 있다. 모두 수준이 꽤 높은 편이다. 학교 특강과 방송, 인터넷 무료강의 등을 통해 익힌 실력이다. 효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역사 공부를 하고 싶다”며 “역사 공부를 평생 이어가려면 외국어가 유용할 것 같아 혼자 익혔다”고 말했다.

# 경쟁없는 경쟁력을 꿈꾼다 정부의 국·공립대학 평준화안이 발표되자 교육계는 난리가 났다. 특히 사교육업계는 ‘패닉’에 빠졌다. 한 유력한 사교육업계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어떤 개혁을 하더라도, 우리 국민의 특성상 사교육은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정부는 무한 경쟁의 교육에 진저리치는 수많은 시민들의 지지속에 개혁안을 추진했다. 정부는 국·공립대학 평준화안을 설명하면서, 초·중·고등학교 장기 개혁방안도 함께 발표했다. 사실상 교육 시스템 안에서는 불필요한 경쟁을 없애겠다는 ‘폭탄 선언’이었다.

김씨는 그때부터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김씨는 “처음에는 믿기 힘들었지만, 정부의 장기개혁안을 보고 신뢰가 생겼다”며 “나라도 먼저 실천하는 것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둘째 현진이는 내년에 전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할 예정이다. 현진이의 장래희망은 자동차 레이서가 되어 한국인 최초로 F1 자동차경주 대회에 출전하는 것이다. 현진이는 자동차 관련 학과에서 기초부터 다지고 싶어한다. 현진이는 “자동차에 대해서 확실히 안 다음에 운전을 배우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며 “황당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부모님은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고 말했다.

# 보육도 사회의 책임 지난해 11월 시현이를 낳은 이명희씨는 현재 육아휴직 중이다. 출산휴가를 마친 뒤 바로 휴직을 신청했다. 시현이의 돌잔치까지 치른 뒤 다시 직장에 복귀할 예정이다.

한국은 지난해부터 덴마크의 육아관련 휴가제도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산전·산후 휴가는 출산 전 4주, 출산 후 14주 해서 총 18주(126일)다. 물론 유급휴가이다. 자신이 받던 급료의 100%를 그대로 받을 수 있다. 유급 육아휴직은 아이가 8살 때까지 최대 50주를 쓸 수 있다. 산전·산후 휴가와 중복되는 기간을 제외하면 32주가 이에 해당한다. 이때는 소득 대체율이 60%가량으로 낮아진다.

이씨가 직장에 복귀하면 부부는 시현이를 집 근처에 있는 공공 탁아소에 맡길 예정이다. 공공 탁아소는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아이들을 돌봐준다. 김씨가 오후 3시면 퇴근하기 때문에 시현이를 데리러 가는 시간은 충분하다. 공공 탁아소의 비용은 월 50만원이 채 안된다. 기저귀와 식사비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김씨는 “국가에서 보조금이 나오기 때문에 크게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면서 “이런 계산이 다 됐으니까 아이를 낳은 것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 국민을 돌봐주는 국가 김씨 가족은 현재 송파구에 있는 112㎡(34평)짜리 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4년 전에 입주했다. 임대아파트 입주 신청을 꼭 5년 전에 했으니 입주까지 1년 가까이 걸린 셈이다. 주거환경은 매우 만족스럽다. 그 전에 살던 20평대 전세 아파트에 비해 훨씬 더 삶에 여유가 생겼다.
김씨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내집마련은 꿈도 못꾸고 있었다. 전세계약이 2년에 한번 만료될 때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김씨와 부인 이씨의 수입으로는 집값은커녕 해마다 올라가는 전세보증금을 따라가기에도 모자랐다.

그러나 임대아파트에 입주하면서 김씨의 집 걱정은 사라졌다. 김씨 가족이 현재 살고 있는 정부 임대아파트의 임대료와 관리비는 민간업체에 비해 절반도 안된다. 전에 살던 집보다 시내와의 거리가 조금 멀어지기는 했지만 계약기간이 30년이나 되기 때문에 입주할 때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30년이면 두 딸은 물론 막내 시현이까지도 결혼시킬 수 있다. 김씨는 “가족수가 많으면 임대아파트에 우선권이 생긴다”며 “시현이가 큰 다음에 이사를 고려해봐야겠다”고 말했다.

오르는 전세금에 쫓겨 살 때나 지금이나 김씨 부부의 은행 통장에는 잔액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분명히 차이는 있다. 과거에 김씨 부부가 저축을 ‘못했다면’, 지금 김씨 부부는 저축을 ‘안한다’. 김씨는 “그동안 기를 쓰고 저축을 한 것은 노후와 교육에 대해 전혀 보장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이제 노후와 교육을 국가에서 어느 정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저축보다 현재 삶의 질에 더 신경을 쓴다”고 말했다.

# 이제 세금이 아깝지 않다 새 정부가 복지국가를 지향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김씨는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데 도대체 누가 일을 하겠어’란 생각이 들었다. 줄줄이 증세 방안이 발표될 때는 공공연히 불만을 터뜨렸다. 김씨는 “이전 정부로부터 혜택받은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정부가 돈을 뜯어간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말했다.

이제 김씨의 생각은 바뀌었다. 김씨가 낸 세금이 바로 자신에게 몇 배의 혜택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금뿐만 아니라 국민건강보험, 국민연금 등의 인상효과도 보고 있다. 지난해 백혈병으로 큰 수술을 받은 김씨의 조카는 확대된 보험 범위 덕분에 경제적 위기없이 병을 이겨낼 수 있었다. 김씨는 “이제 정부를 신뢰한다”고 말했다.

# 결국 정치가 바꿨다 10년 전의 삶과 지금을 비교할 때 ‘무엇이 가장 달라졌는지’ 김씨는 자문했다. 김씨는 ‘여유’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는 “그때는 일과 허덕이는 일상에 내 삶이 끌려가는 꼴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나의 삶과 일의 주인이라는 느낌으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되돌아보면 김씨의 삶을 바꾼 원동력은 정치였다. 김씨는 그 해 투표에서 매우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 김씨는 “예전에는 나름의 애국심에 시민이 희생하더라도 국익을 위해 몸바치겠다는 후보,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정당을 선택했다”며 “그러나 지금은 무조건 나와 내 가족에게 혜택을 주겠다는 정당과 후보에게 표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을 입시지옥에서 구하고, 아픈 사람들은 누구나 병원에 갈 수 있고, 한국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의식주 걱정없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든 것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 시리즈 끝 >

▲특별취재팀

서의동 경제부 차장,조찬제 국제부 차장,김재중 문화부 기자,장관순·홍진수·송윤경 정치부 기자,이로사·유희진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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