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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

ㆍ비례대표제 확대 등
ㆍ사회적 약자를 대변할 힘있는 정책 정당 부재
ㆍ이념·가치에 투표할 때… 지역중심 정당구도 탈피

신자유주의 문제의 핵심은 그 체제가 사회경제적 약자를 양산하고 그들의 사회적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빼앗아간다는 데에 있다. 신자유주의화가 심화될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빈곤과 소외의 고통을 받게 된다.
이들 대부분은 당당함을 버리고 비굴함을 택하라는 시장의 압력에 마지못해 굴복하곤 한다. 사회는 더 이상 따뜻한 공동체가 아니라 차가운 경쟁의 장에 불과할 뿐이다. 참으로 쓸쓸한 일이다.

신자유주의 대안 체제는 무엇보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빈곤과 소외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사회경제적 약자 계층에 대한 체계적인 배려가 제도화되어 궁극적으로는 약자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체제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배려의 제도화’는 정치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대안 체제 마련은 결국 정치적 과제라는 의미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사회경제적 약자의 정치적 대리인 역할은 정당이 맡게 돼 있다. 의회를 포함한 정치권에서 이루어지는 배려의 제도화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주체는 사회경제적 약자집단이 아니라 그들을 대변하는 정당인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의 대안 체제 건설은 사회경제적 약자의 시민권 보호를 주업으로 하는 유력 정당의 존재를 요건으로 한다. 노동자, 소상공인, 도시빈민 등을 자신들의 ‘정치적 고객’으로 삼는 이념 혹은 정책 정당들이 포진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지금 상황의 우리나라에 신자유주의 대안 체제가 제대로 설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배려의 제도화를 주도해갈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겸비한 이념이나 정책 정당이 없기 때문이다. 군소정당에 불과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는 정치적 능력을 기대하기 어렵고, 정체성이 불분명한 민주당에는 당의 집단의지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이 약자를 위한 정당으로 거듭날 리는 없다.

정확히 말해, 우리나라의 정당 구도는 아직 지역과 인물 중심의 전근대적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이 정당 구도를 이념과 정책 중심의 것으로 개혁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이 땅에 대안 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


이론과 경험이 공히 증명하듯, 선거제도의 개혁은 정당 구도를 변화시킨다. 현행 소선거구 1위 대표제를 폐지하고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전면 도입한 경우를 상정해보자. 유권자들은 이제 인물이 아닌 정당에 대해서만 투표한다. 선거 게임의 내용이 인물 경쟁에서 정당 경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당들은 어떻게든 각 지역구에서 가장 인기 있는 후보를 많이 만들어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던 과거의 행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지역주의나 금권 등을 활용한 특정 지역에서의 특정 인물 선전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승부는 소지역이 아니라 전국 수준에서, 인물 간이 아니라 정당 간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서 각 정당의 핵심 전략은 어떻게 여타 정당들과 자신을 차별화시키느냐에 모아진다.

가장 안정적인 차별화 전략은 각 정당이 자기 고유의 이념, 정책 기조, 지향 가치 등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것이 비례대표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들의 정당 구도가 이념과 정책 중심으로 구조화돼 있는 이유다. 이 원리가 우리나라에만 적용이 안 될 이유는 전혀 없다. 즉 우리 선거제도를 비례성이 보장되는 것으로 개혁한다면 우리도 정당의 구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된 1980년대와 90년대에도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대다수 선진국들은 자기들 나름의 복지자본주의를 거의 원형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나라들이 예외 없이 비례성이 충분한 선거제도를 갖추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선거제도 덕에 이념 혹은 정책 정당들이 정치권 내에서 상당한 지분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배려의 정치경제가 바로 그들에 의해 지속돼왔던 것이다.

우리도 이제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를 도입하여 이념과 정책 중심의 정당정치 활성화를 도모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식 ‘배려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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