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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

ㆍ금융대란·민생파탄·청년실업… ‘투표의 결과’다



“멍청하긴, 문제는 경제야.”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이제는 전설이 된 빌 클린턴 미국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1992년 대선 구호다.

당시 부시 대통령, 즉 조지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인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걸프전에서 승리해 재선을 장담하며 기고만장해 있었다. 그러나 미국 경제는 죽어가고 있었다. 무명의 클린턴 후보는 이를 정확히 포착해 쟁점화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승리했고 민주당은 12년 만에 정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클린턴의 구호는 절반의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진짜 문제는 전쟁도, 경제도 아니고, 정치였다. 다시 말해, “멍청하긴, 문제는 정치다.” 물론 경제가 문제라는 클린턴의 주장은 맞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인식을 갖고 정책을, 경제를 바꾸는 것은 결국 정치다.

다시 말해, 경제가 문제임에도 이 문제는 방치하고 전쟁에나 몰두하고 있었던 부시의 정치, 공화당의 정치, 이 같은 정당과 지도자를 지지한 유권자 등 미국의 정치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유권자들은 투표를 통해, 투표라는 정치행위를 통해, 미국 정치를 바꿔줬다. 만일 유권자들이 투표를 통해 미국 정치를 바꿔주지 않았다면 “문제는 경제”라는 인식은 허공의 메아리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멍청하긴, 경제는 정치가 바꾼다”

최근 세계적으로 반신자유주의의 챔피언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베네수엘라다. 차베스 대통령은 80년대 말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식료품값 폭등에 분노해 일어난 민중봉기 진압작전에 군지휘관으로 투입되어 민중에게 총을 겨눠야 했다. 이에 절망해 92년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해 감옥에 갔다. 출옥 후 선거혁명으로 노선을 바꿔 98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고 빈민에게 복지와 교육, 의료를 확대하는 등 반신자유주의의 진보노선을 추구했다.

그러자 보수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카리브해의 외딴 섬으로 유배시켰고 상공회의소장을 신임 대통령으로 선포했다. 이 소식을 들은 빈민들은 거리로 달려나와 대통령궁을 포위했고 결국 차베스를 구해냈다. 국민들의 ‘거리의 정치’가 차베스와 반신자유주의 혁명을 살려낸 것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탄핵의 위험에 처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구해낸 것은 바로 거리로 달려나온 국민들이었다. 이 같은 ‘거리의 정치’의 힘은 ‘선거 정치’의 힘으로 이어져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으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세력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시장 중심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속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는 등 지지층에 반하는 정책을 폈다. 그 결과 사회적 양극화가 계속 심화됐고 이 같은 실정에 분노한 유권자들은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묻지마 지지’를 했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국민의 선택과 ‘밥 굶는 청소년’

부자들에 대한 감세로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다. 어렵게 획득한 민주적 권리들은 다시 사라지고 있는 가운데 남북관계는 냉전시대로 뒷걸음치고 있다.

얼마전 이명박 정부는 초·중·고등학교의 영어교육 예산을 늘리기 위해 무료급식 예산을 줄였다. 그 결과 점심을 굶는 학생들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이 모두는 결국 2007년 대선에서 국민들이 투표한 결과, 나아가 기권한 정치행위의 결과이다. 국민들의 선택이 부자들의 더욱 두꺼워진 지갑과 밥 굶는 청소년들을 가져온 것이다.

70년대 후반, 하루종일 하는 예비군 소집훈련을 갔다. 쉬는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예비군 훈련이라니”라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한 사람이 일어나 “자업자득이지. 너희들은 더 당해야 해”라며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의아해하는 우리에게 그가 던진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김대중 후보가 예비군 없애겠다고 공약했는데, 너희들이 박정희 찍었잖아. 그래 놓고 왜 난리들이야?”

그렇다. 신자유주의도, 이에 따른 민생 파탄도, 월스트리트발 금융대란도, 강부자 정책도, 용산참사도, 88만원 세대로 표현되는 청년실업도 모두 정치의 결과이다. 정치의 핵심은 다양한 가치와 이를 반영하는 다양한 정책 중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가치와 정책을 선택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투표라는 국민들의 ‘선거의 정치’와 다양한 ‘거리의 정치’를 통해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를 가진 정치세력을 선택하고 지지하거나 압박해 간접적 방식으로 우리가 바라는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영어교육이냐, 밥 굶는 청소년이냐는 선택이다.

따라서 기권과 같은 정치적 무관심과 정치적 허무주의는 사실상 자신의 미래를, 자신의 삶의 조건을 스스로 포기하는 ‘자살행위’에 다름아니다. 정치가 우리의 미래와 삶의 기본조건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공기가 아무리 더러워도 우리가 숨을 쉬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정치도 더럽고 혐오스럽다고 우리가 이를 벗어나 살 수는 없다. 따라서 정치를 통해 이를 살 만한 것으로 바꿀 수밖에 없다. 기권이라고? “멍청하긴, 문제는 정치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역사상 가장 큰 격차로 승리했다. 그러나 낮은 투표율 때문에 전체 유권자에 대해서는 매우 낮은 지지율로 승리했다. 구체적으로, 2002년 대선 때 70.8%였던 투표율이 63%로 급락해 전체 유권자의 30.5%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유권자 10명 중 7명이 이 대통령을 찍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물론 2002년과 비교할 때 기권한 7.8%의 유권자들의 정확한 성향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절대다수가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후신인 민주당, 그리고 민주노동당 같은 진보정당에 실망한 진보개혁세력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기권하지 않았다면 대선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국민참여·선거제도·정당개혁 해법

결국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투표에 적극 나서야 한다. 나아가 가치나 정책과는 거리가 먼 지역주의적 투표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정치를 투표와 같은 ‘선거 정치’로 한정시켜서는 안 되며 촛불시위와 같은 ‘거리의 정치’도 중요하다. 그러나 광우병 촛불시위, 용산참사, 쌍용차, 언론법 등이 보여주듯이 거리의 정치로는 한계가 많다.

둘째, 정치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를 통해 반인간적 신자유주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유권자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표를 줄이고 민의가 제대로 정치에 반영될 수 있도록 독일식으로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 현재의 선거제도 덕으로 한나라당은 2008년 총선에서 37.5%의 지지밖에 받지 못했으면서도 51.2%의 의석을 차지한 거대여당이 됐다. 반면에, 예를 들어, 2.98%를 얻어 독일식이면 9석을 배정받았을 진보신당은 한 석도 얻지 못했다. 그런데도 한나라당과 헌법자문위원회는 비례대표를 없애고 상원을 만들겠다고 한다. 자다 일어나 봉창 두드린다고, 아닌 밤중에 웬 상원 타령인가?

셋째, 정당, 특히 제1 야당인 민주당이, 나아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같은 진보정당이 변해야 한다. 민주당의 경우 단순한 반MB연대론과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내세운 유훈정치를 넘어서 과거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반성하고 민생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 새로운 투표 블록을 만들어내야 한다. 친노신당 세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스웨덴을 최고의 복지국가로 만든 것은 노동자, 농민의 연합에 의한 ‘복지의 정치’였다. 원래 미국의 민주당도 농업이 주산업인 남부 노예주들의 골보수 정당이었고 노예 해방의 링컨은 공화당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전통적인 지지기반 이외에도 국제경쟁력이 있는 첨단자본들과 새로운 정치세력인 노동자들을 포섭할 수 있는 진보적 프로그램으로 뉴딜연합을 만들어 민주당과 미국 정치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진보정당들도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왜 반신자유주의적인 진보정당이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부보다 더 신자유주의적인 한나라당을 지지했는가를 반성하고 실력을 키워야 한다. 문제는 단순히 반MB연합 같은 정당과 사회단체들 간의 상층부 연합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대중을 조직해 반신자유주의적인 풀뿌리 복지 블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는 자살을 하고 싶다면 기권을 하라. 그렇지 않다면, 투표를 하고 거리의 정치에 나서는 등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기권이라고? 멍청하긴, 문제는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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