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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4월, 27년간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살다 지역사회로 나온 고 송국현님은 장애3급으로 활동보조서비스 대상에서 탈락했고, 화마가 덮쳤을 때 그를 지원할 사람이 없어 피하지 못했다. 시설 밖 삶을 누리기엔 짧았던 시간 1년. 2014년 4월17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를 떠나보낼 때 함께 활동하던 자립생활센터 동료들은 오열하며 죽음의 원인을 국가에 물었다. 추모제에 모였던 이들은 불평등한 삶과 죽음에 분노하며 장애인 차별 없는 ‘다른 세상’을 약속했다. 처절하게도, 죽음은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나는 그가 활동하던 자립생활센터에 2주간 머물 일이 있어 생전에 그를 몇 번 만났다. 어느 날 뭔가 갈등이 생겼는지 탈시설한 선배로부터 ‘잘살아야지. 이럴 땐 이렇게’란 조언을 듣기도 했다. 옆에 있던 내가 보기엔 조언보단 그 만남 자체를 즐기는 듯 유쾌하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자유로운 삶이란 곁에 머물러줄 친구를 믿고 좌충우돌,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바라는 대로 살아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 자유를 지지하는 친구는 있었지만, 자유를 위한 권리와 제도를 보장하는 국가는 없었다.
희망, 사랑, 함께, 빛, 꽃, 생명…. 장애인 거주시설의 이름은 유달리 긍정적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긍정은 장애에 대한 불행과 비극을 뛰어넘자는 부정과 극복을 강요한다. 장애인 수용시설이 아닌 주체적이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거주시설로 바꾸어 부르지만, 여전히 시설은 ‘일정한 곳에 자리를 잡고 머무는 삶’을 뜻하는 거주가 아닌 ‘특정한 부류의 사람을 일정한 장소에 모아 놓음’이란 수용의 상태다.
6년여간 309명이 사망하고, 인권침해와 횡령이 있었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대구시립희망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본다. 세상구경과 체험, 나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거주인들의 사진이 보인다. 이들에게 세상은 구경하거나 체험해야 할 삶과는 괴리된 어떤 방문지였던 걸까? 관리와 훈육을 위한 폭행, 심리 안정과 치유란 이름의 감금, 징계를 위한 격리는 그들의 생명조차 위협했다. 장애인의 안전을 위한다며 박탈한 삶의 자유는 위험한 상태로 이들을 내몰았다. 그러니 자유로워야 안전할 수 있다. 대구시립희망원 인권유린 및 비리척결 대책위원회는 사태 해결을 위해 희망원 공적 운영, 대형화된 희망원 시설 폐쇄 및 기능 전환, 희망원 생활인에 대한 탈시설 자립 지원 등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지만 대구시와 보건복지부는 해결에 적극 나서지 않고 있다. 사회적 죽음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어제 광화문광장엔 3년 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분노하며,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 안전과 존엄한 세상을 염원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 옆에 대구시립희망원에서 죽어간 얼굴과 이름이 없는 고인 309명의 영정이 바닥에 놓였다. 영정들 앞에는 ‘수용시설정책 폐지!’라는 구호가 적힌 영정이 놓인 단이 마련됐다.
장애인을, 세월호에 탔던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사회가 아니었다면 어디선가 이들도 우리처럼 2017년 4월의 삶을 살고 있을 거다. 추모는 현실을 비판하고 바꾸는 투쟁이며 연대다. 4월, 광장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모두의 삶을 위한 것이다.
국가가 사회적 죽음을 책임지지 않는 순간, 살아있는 자들의 삶도 위태롭다.
이진희 |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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