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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사건에 대한 고등법원 판단이 열흘 남짓 남았다. 온갖 수사를 동원했지만 결국 그릇된 통념에 기대어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1심의 무죄 판단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엄청났다. 선고 당일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은 무죄 판단에 분노해 자발적으로 모여든 국민들로 가득 찼고, 며칠 후 열린 집회에는 2만여명이 집결해 무죄라 판단한 사법부가 유죄라고 1심 재판부를 규탄했다. 이는 1심의 결론이 실제 현실에서 여성들의 경험이나 인식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위력에 의한 성폭력 현실과 얼마나 괴리가 큰지 증명했다.

수행비서에 대한 성폭력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2018년 12월 21일 오전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1심 판단에서 가장 쟁점이 된 것은 ‘성인지 감수성’이었다. 2018년 대법원은 “법원이 성폭행이나 성희롱 사건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한다”고 성인지 감수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심 재판부 역시 ‘판단에 있어서의 고려사항’ 중 하나로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1심의 결론은 이미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와 실천을 통해 성인지 감수성이 1도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오히려 통념을 정상화하고 남성중심적 편향적 성별권력의 작동을 은폐함으로써 엄호했다는 평가를 받는 등 1심 무죄 판단의 문제점은 넘치도록 많이 지적되었다. 그래서 나는 2월1일로 예정된 고등법원의 판단은 1심과는 다른 정의로운 결론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성인지 감수성의 바른 해석이고 정의이기 때문이다.  

1심부터 2심까지 나는 현장에서 재판 과정을 지켜봤다. 1심 재판 과정에서 가장 나의 심금을 울렸던 순간은 피해자의 최후 진술 때다. 많은 내용 중 내게 가장 인상적인 말은 ‘힘든 개인사들을 겪으면서도 일에 집중하며 견뎌냈고, 일에 파묻혀 살았습니다’라는 것이었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어본 사람이라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았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일에 몰두하는 순간에만 끝없이 떠도는 의문과 분노, 잡념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 피해자가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비슷한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그 진정성을 안다. 그래야 또 하루를 살아낼 수 있으니까.

한편 피고인과 피해자 사이에 성관계에 대한 합의에 이를 만한 교감이 오고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었던 피고인 측은 2심 최후변론으로 ‘사랑을 전제로 한 성관계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성관계가 가능한 관계는 다양하다’는 주장을 했다. 맞다. 그날 만나서 바로 성관계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누구나 꼭 사랑을 전제로 성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성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도 직장상사와 원나잇을 꿈꾸거나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도 입사 한 달도 안된 신입사원이…. 사건의 실체와 만나는 느낌이었다.  

나는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를 보며 울컥했고, 피고인과 변호인단의 억지주장에 분노했으며, 그 자리를 함께 지킨 여성들에게서 깊은 연대감과 변화의 희망을 보았다. 2월1일, 고등법원의 정의로운 판결을 원한다. 또 다른 피해자가 없기를 소망하면서 용기를 낸 김지은씨와 무수한 성폭력 생존자들에게 변화의 희망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기를 바라며 나는 그날도 법원으로 갈 것이다.

<김민문정 |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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