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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 당나귀 인형을 하나 사왔다. 세계연극축제가 열리는 알마그로에서였다. 짚으로 엮어 만든 것치고 꽤나 섬세했다. 길고 뾰족하게 솟은 귀, 빗자루처럼 납작하게 결을 고른 갈퀴, 쾌활하게 뻗은 꼬리까지. 요즈음의 다른 당나귀 캐릭터처럼 귀여운 척 유난떨지 않으면서도, 너무 투박하지도 않게 섬세한 면까지, 그냥 마음에 쏙 들었다. 한눈에 반했다고나 할까, 뭔가 통했다고나 할까, 보는 순간 너는 이제부터 나와 가야겠다 마음먹었달까, 망설임도 없이 흥정도 없이 덜컥 사 버렸다.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지푸라기 당나귀를 옆에 끼고 숙소로 돌아왔지만, 생각보다 크기가 커서 여행용 가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가방에 들어가려면 꼬리든 귀든 잘라내야 할 판이었다. 하필이면 다음날이 출국일, 이걸 어쩌나, 뭐에 씌어서 이런 지푸라기 인형을 사 왔나, 짐도 이미 차고 넘치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수를 낸 사람은 여행을 함께 한 K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중국상점에 가 이민가방을 사서 공항으로 갔다. 인적이 드문 구석에 짐가방을 풀어헤치고 넣었다 빼기를 반복해 겨우 포장을 끝냈을 땐 수속 마감이 임박해 있었다. 나름 긴박했던 당나귀 수송작전. 장차 식당의 마스코트가 될 놈이었다.   

나는 사실 당나귀가 무섭고 싫었다. 당나귀에 대한 최초의 이미지는 피노키오로부터 왔다. 그렇게 말썽을 피우고 못된 짓만 골라 하고 할아버지 속을 썩이더니, 기어이 당나귀가 되어버린 피노키오. 당나귀란 형벌의 다른 이름이었다. 잘못하면 당나귀가 된다. 당나귀가 된다는 건 일생을 짐을 얹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나귀가 되지 않으려면 어른 말 잘 들어라. 그런 교훈을 주입하는 피노키오가 참으로 싫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소금장수의 당나귀, 팔랑귀를 가진 어리석은 부자의 어깨에 매달린 채 팔려가는 당나귀, 어디다 알리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게 만든 임금님 귀 당나귀 귀 같은 것들은 또 어떠한가. 배고프고 목마른 당나귀가 양쪽에 놓인 물과 건초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죽게 된다는 뷔리당의 결정 장애 당나귀는 물론이고, 의리는 있지만 멍청하고 수다스러운 만화 캐릭터까지. 실제로 마주한 당나귀란 똥주머니를 찬 채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며 호객을 하는 관광지의 당나귀뿐이었다. 내가 직접 올라타지는 않겠지만, 눈을 질끈 감고 외면하고 싶은 존재. 산초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산초가 타고 다니던 당나귀의 이름은 루시오(rucio). 잿빛 혹은 회색이라는 뜻. 그저 다른 모든 당나귀의 하나로 취급하고 싶지 않았던 산초는 그의 당나귀를 가리킬 때 늘 루시오라 불렀다. 검둥이나 누렁이, 흰둥이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산초의 당나귀는 잿빛이. 잿빛이는 돈키호테의 말 로시난테와 함께 주인 잘못 만나 별의별 고초를 다 겪는다. 배곯고 나자빠지고 구덩이에 빠지고 양떼에게 몰리고 고깔모자를 뒤집어 쓰고. 그 와중에 산초에 대한 의리는 변함이 없다. 둘시네아의 마법을 풀기 위해 삼천대의 매질을 할 때 그 옆을 지킨 것도 잿빛이며, 사람 키의 세 배가 넘는 깊은 구덩이로 떨어졌을 때 산초를 받아낸 것도 잿빛이였다. 산초 역시 자신보다는 잿빛이 우선이었는데, 잿빛이를 위한 건초와 잠자리를 먼저 챙기고 난 후에야 자신의 자리를 보았으며, 구덩이에 빠져 밤을 지새울 때조차 자루에 든 마지막 빵은 잿빛이에게 양보했다. 그때 잿빛이에게 ‘빵이 있으면 고생도 할 만하다’고 말하던 산초의 진심은, 네가 있어 고생도 할 만하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당나귀와 산초의 신의와 우정이라니. 산초의 말에 의하면, 그의 당나귀 잿빛이는 돈키호테의 여윈 말 로시난테와는 비교도 안되는 멋진 외모에, 마음을 나눈 동료이자 친구이고 온갖 고생과 가난을 함께해온 동반자이며, 제 눈을 반짝이게 만드는 빛이고, 그저 한 마리 회색 당나귀가 아닌, 내 보물, 내 목숨, 내 안식, 내 선물, 내 사랑, 나의 루시오다. 

마지막 여행지에서 지푸라기 당나귀 인형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돈키호테에게 산초가 있고, 산초에게는 루시오가 있듯, 나에게도 지푸라기 당나귀가 있다. 그것이 나를 보호하리라. 실제로 알마그로에서 데리고 온 지푸라기 당나귀는 식당을 하는 동안 오늘도 즐겁게 모험 중이라 알리는 팻말을 대신했으며, 한밤중에 내 속엣말을 들어주는 묵묵한 친구 역할을 해주었다. 안식이고 위안이었던 나의 든든한 동반자 지푸라기 당나귀. 식당을 접고 난 후에도 제일 먼저 챙겨 소중히 집으로 옮겨왔다. 아직 모험은 끝나지 않았으므로. 

지푸라기 당나귀를 품고 문을 잠그던 그날 문득, 산초가 총독을 마치고 나와 잿빛이의 얼굴에 입맞춤을 하며 눈물을 글썽이며 한 말을 떠올렸다. “너와 마음을 나누고 네 마구를 손질하고 네 작은 몸뚱이나 먹여살릴 일 이외에는 다른 생각일랑 하지 않으면서 보낸 나의 시간들과 나의 나날들과 나의 해들은 행복했었지.” 나도 행복했다. 그런데 이런, 아직까지도 내 당나귀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으니. 어디서 응앙응앙 당나귀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천운영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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