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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거주시설의 거주인들과 함께하는 워크숍을 얼마 전 마무리했다. 시설에 도착하자마자 날카롭게 들려오는 한마디. “앞으론 간식 사올 때 미리 이야기해 주세요. 간식 먹고 계속 토했어요!” 교육 담당자의 입장은 단호했다. 지난주에 참여자 중 몇 분이 간식을 드시고 아프셨단 이야기다. 관리자임을 확인시켜 주는 말의 내용에 화가 나서 “정해진 음식과 양이 아니라 오랜만에 자유롭게 드시다 그랬던 거 같네요”라고 받아칠 뻔했다. 그러다가도 많이 아프셨을 거주인 곁에서 같이 애썼을 생활재활교사(‘생활을 재활하는 선생님’이란 뜻으로 거주인의 일상생활에 대해 관리하는 권한을 전제하고 있다. 누군가의 생활이 ‘재활’의 대상이 된다는 것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현장에서 폭넓게 쓰이는 개념을 통해 현장 상황을 전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한다)에게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건강에 대한 책임과 관리가 사회복지노동자의 몫이니 날카로울 법도 하다. 그런데 이 문장을 적으면서도 나는 석연치 않다.

사회복지노동자의 위치를 이해하는 이런 방식은 적절한 걸까? 왜 건강에 대한 책임과 관리의 몫에서 당사자는 빠지고 노동자의 몫이 되었을까? 아팠던 거주인을 지원했던 생활재활교사는 단지 ‘일’만 했던 걸까? 시설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이는 거주인의 결정권을 존중하는 것보다 이미 나누어진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압박이 더 클 것이다. 나는 거주인과 노동자를 각기 만나 확인하고 싶은 궁금증들을 거주시설의 구조적 조건으로 이해하려 했지만, 사회복지노동자의 노동권만으로 설명하기엔 충분치 않다. 문득 사회에서 인정하는 ‘노동’이란 폭이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든다. 편안한 잠자리를 위한 가장 좋은 자세를 찾기 위해 거주인과 노동자가 나누었을 수많은 대화 같은 것들은 사회복지 지원체계, 그것도 거주시설이라는 공간 안에서 의미있는 노동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때로는 친밀함이 쌓인 관계에서 서로를 위해 “다른 방법은 어떨까”라고 조언할 수도 있다. 조언의 방향이 늘 일방적인 것은 문제지만 상호적일 수만 있다면 동료로 만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와 과정 속에서 지원을 주고받는 이들의 평등한 관계를 상상해 볼 수 있지만, 관리를 강조하는 ‘시설 안’에선 불가능한 꿈이다. 장애인 인권도, 사회복지노동자 권리도 함께 시설이라는 구조에서 잊혀져 왔다. 돌봄노동에 대한 낮은 사회적 평가도 한몫 거든다.

장애인 거주시설 로비와 복도에서는 활동을 전시하는 사진들이 종종 눈에 띈다. 거주인들의 소풍, 생일잔치, 명절 행사 등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 거주시설 노동자들도 함께 서 있다. 중앙엔 주로 원장이나 대표가 자리한다. 장애인이 시설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로 사진이 전시되듯 사랑과 희생의 상징으로 사회복지노동자도 한쪽에 놓이는 현실이 너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벨 훅스는 책 <올 어바웃 러브>에서 “사랑을 한다는 것은 두려움과 공포, 소외와 분리에 저항한다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고자 하는 의지, 타자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려는 의지”라고 했다. 돌봄을 주고받으며 살았던 경험들도 이처럼 사진 속 상징과 같은 사랑과 희생이 아닌 방식으로 다시 쓰여질 수는 없을까? 반성과 갈등을 포함한 이야기들이 어쩌면 돌봄을 주고받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모두에게 성찰적인 지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진희 |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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